정인옥 추모비,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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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 63-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인옥 선생은 충북 괴산군 상모면 문강리에서 서기 1875년 12월 8일 부친 정기호씨와 모친 양해집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거주지를 경북 문경군 문경읍 하초리 265번지로 옮겼고 다시 충남 공주군 탄천면 삼각리 36번지로 이도하여 이곳에서 76세를 일기로 서기 1950년 1월 24일 서거하였다. 선생은 드물게 보는 효자요 또한 애국지사로서 그의 일생은 오로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파란만장의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동양에서 패권을 잡기 위하여 청일 노일 양대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한국을 식민지화할 뜻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서기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서기 1910년 한일합방을 단행하여 송두리째 우리나라 주권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국민 중에는 을사조약 이후 자결순국하는 자가 속출하였고 그 밖에 애국청년
들은 전국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게 항전을 계속하여 많은 희생을 내기도 하였다. 정선생은 이러한 대열의 선두에서 항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서기 1907년 8월 11일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경술국치가 이루어지던 해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굳은 결심은 결코 변할리 만무였다. 유일한 목표는 빼았긴 나라를 도로 찾는 길 밖에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한복으로 변성명까지 해가며 표면으로는 경천교란 종교적 간판을 내세우고 안으로는 독립쟁취를 위한 지하운동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간선 자신의 소유토지를 팔아서 그 금액을 상해에 있는 한국임시정부에 보냈으며, 가계의 인궁함을 감수하였다. 그리고 목숨을 내걸고 밤낮의 구별 없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많은 군자금을 모아서 서울 거주 연락원 신덕영을 시켜 계속적으로 상해의 한국 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서기 1921년 12월 30일 일제에게 잡ㅈ히어 갖은 고문 끝에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이란 중형을 선고 받았던 것이다. 여러 형무소로 전전하며 복역 중 동지 11명이 다시 검거 되니 일제는 그들에 관한 불리한 증언을 강요하는지라 선생은 혀를 깨물고 벙어리 행세로써 일관하였다. 너무도 심한 학대와 악형으로 선생은 더 이상 건강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형집행 7년 6개월만에 가출옥 시키고 말았다. 그 뒤 선생은 각종 질환으로 일생 동안 신음하였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랴. 천도가 무심치 않아 서기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과 같은 열렬한 구국운동에서 연유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어 서기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장남 정순모씨와 차남 정홍모씨는 다 같이 원근에서 이르는 효자일 뿐만 아니라 성품이 돈후하고 예의 바르며 한편으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여 큰 칭송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마음가짐을 배워야 할 것은 물론 영원히 신의 가호가 있어 그의 가문에 무궁한 번영이 더하기를 소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부귀영화도 아랑곳 없고 생명 또한 홍모처럼 가볍게 여겨
진충성인한 정인옥 선생의 애국충정은 길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온누리에 빛날 것이다. 선생의 손 정진웅씨는 조부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추모의 정으로 수년간에 걸쳐 항일 자료의 조사 발굴에 헌신하여 마침내 이 비석을 건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음을 이에 밝혀 두는 바이다.
서기 1979년 4월 6일
문학박사 임헌도 찬
완산 이공 권 서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 63-1 애국지사 두산 정인옥 추모비를 찾았다.
안내문
여기에 세워진 추모비는 애국지사 정인옥(鄭寅玉)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정인옥(鄭寅玉) 선생은 76세를 일기로 1950년 1월 24일 서거하시기까지 드물로 보는 효자이셨고 또한 애국지사로서 그 일생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파란만장의 생을 보내셨다. 서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역사적인 지옥의 일제통치하에서 민족의 수난이 시작되었을 당시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에 항쟁한 의병대열의 선두에 서서 혁혁한 공적을 남기셨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지원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시다 왜경에 체포 10년이란 긴 세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1981년 국가유공자 묘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조기택 공주군수께서 삼각2리 선생 묘소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나 1996년 10월 9일 정부의 애국지사 국립묘지 안장 계획에 따라 지사님과 배위가 대전 애국지사 국립묘역에 이장된 후 추모비만 남게 되어 지역주민의 청원에 다라 전병용 공주시장께서 선생의 애국충절을 후세에 널리 알려 충효의 고장 공주의 얼을 계승할 수 있도록 이전 사업에 소요되는 이전비를 지원, 삼각2리 절골에서 이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다.
1998. 3. 16 탄천면장
훈장증 - 고 정인옥
위는 우리나라 자유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1990년 12월 26일 대통령 노태우
건국훈장 제872호 愛國志士 斗山 鄭寅玉 先生 追慕碑(애국지사 두산 정인옥 선생 추모비)
동래정씨 제29세손 임당공파 정인옥 선생은 충북 괴산군 상모면 문강리에서 서기 1875년 12월 8일 출생하였다. 선생은 경북 문경군 문경면 하초리 및 충남 공주군 탄천면 삼각리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76세를 일기로 서기 1950년 1월 24일 서거하였다. 일본은 청일 노일 양대전쟁에서 승리하사 한국을 식민지화할 뜻에서 서기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서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역사적인 일제 통치하에서 민족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따라서 국민중에는 구국일념으로 전국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게 항쟁한 분이 많았고 선생은 이 의병대열의 선두에서 항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서기 1907년 8월 11일 일제관헌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경술국치가 이루어지던 해 겨우 석방되었으니 선생의 애국심은 변하지 아니하고 구국운동에 전력을 기울여 김한복으로 변성명하였고 표면적으로는 경천교란 종교적 간판을 내세우고 지하조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소유지 등 전재산을 매각하여 재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하였고 가계의 인궁함을 감수하면서 일제의 요시찰인으로 감시 속에서도 경상 전라 충청도 지방의 독립운동 자금모금책임자로 영주 봉화 금산 충주 논산 등지에서 모금한 거액을 상해임시정부 자금전달책 신덕영 이광세 등 동지에게 교부 헌납하였고 서기 1921년 12월 30일 충북 청주군 현도면에서 독립자금을 헌납하겠다는 자를 방문하니 이미 왜경이 대기중인지라 현장에서 체포되어 강원 검사국을 거쳐 공주지방법원으로 송치 대정 8년 제령 제7호 및 총포 화약류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0년이란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공주 대전 평양 부산 청주 등 전국 각 형무소로 전전하며 복역 중 동지 11명이 다시 검거되어 일제는 그들에 관한 불리한 증언을 강요하며 단근질과 전기고문 등 극심한 학대 그러나 선생은 혀를 끊어 동지들의 활약상을 묵비로 일관하니 생명이 위독하여 옥중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형집행 7년 6월만에 청주형무소에서 가출옥시키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옥고득병으로 인한 투병생활을 계속 중 서기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이는 모두 선생과 같은 열렬한 구국운동에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빛난 공적을 기려 서기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부귀영도 아랑곳 없이
생명 또한 홍모처럼 가볍게 여겨 진충성인한 정인옥 선생의 애국충절을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온누리에 길이 빛내고저 정부에서는 구국유공자 묘소 정화계획을 수립하여 이 비를 세움
서기 1981년 4월 4일 공주군수 조기택 세움
愛國志士 斗山 鄭寅玉 先生 紀蹟碑(애국지사 두산 정인옥 선생 기적비)


안내문
여기에 세워진 추모비는 애국지사 정인옥(鄭寅玉)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정인옥(鄭寅玉) 선생은 76세를 일기로 1950년 1월 24일 서거하시기까지 드물로 보는 효자이셨고 또한 애국지사로서 그 일생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파란만장의 생을 보내셨다. 서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역사적인 지옥의 일제통치하에서 민족의 수난이 시작되었을 당시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에 항쟁한 의병대열의 선두에 서서 혁혁한 공적을 남기셨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지원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시다 왜경에 체포 10년이란 긴 세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1981년 국가유공자 묘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조기택 공주군수께서 삼각2리 선생 묘소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나 1996년 10월 9일 정부의 애국지사 국립묘지 안장 계획에 따라 지사님과 배위가 대전 애국지사 국립묘역에 이장된 후 추모비만 남게 되어 지역주민의 청원에 다라 전병용 공주시장께서 선생의 애국충절을 후세에 널리 알려 충효의 고장 공주의 얼을 계승할 수 있도록 이전 사업에 소요되는 이전비를 지원, 삼각2리 절골에서 이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다.
1998. 3. 16 탄천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