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1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남 공주시 유구읍 추계1리 산 81-1 양지 용목동 독립운동 애국지사 황병주 선생 유허비를 찾아가는데
2Km가 남아있는 지점 마을 앞에서 만났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공주시 유구읍 추계1리 186이다.
2Km가 남아있는 지점 마을 앞에서 만났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공주시 유구읍 추계1리 186이다.
독립운동 애국지사 황병주 선생 유허비
독립운동 애국지사 황병주 선생 유허비문
공의 본명은 병주요 자는 원배며 호는 비암이시다. 본관은 장수이며 시조는 신라시중 황경이시며 조선조 세종시 명상 영의정 익성공 황희의 17세손이시고 우의정 호안공 황치신의 16세손으로 본 고장 신상면(현 유구면) 추계리에 낙향하신 통정대부 황만배의 10세손이시다. 공은 서기 1884년 11월 20일 추계리에서 부 세현공과 모 충주지씨의 독자로 탄생하시었다.
유년시부터 한학을 수학하시어 덕성을 닦았으며 특히 웅변에 능한 재질을 지니신 분이었다. 년기장성하여 밀양박공 용화의 독녀 병화여사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의장이요 차남은 의숙이다. 일찌기 공은 뜻한바 있어 진도교에 입교하여 지방 교주를 맡아 교령 손병희선생과 우국지념에 뜻을 같이하고 서기 1910년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경향 각지의 의사 제위와 그리고 인근 동지인 이정춘 김병헌 현우석 김상규 안태하 제씨등 30여인과 뜻을 같이하고 일제의 항거투쟁하던중 서기1919년 기미3월1일 교령 손병희선생으로 부터 독립선언감행의 밀명을 받고 즉각 본고장 공주 신상에서도 거사키로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각 동리에 전령을 급파하여 동월 14일 신상장날에 동지들과 더불어 군중500여명을 통솔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면내 각지를 순회하니 이에 합세한 자가 수천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격분한 장날 군중들은 왜경주재소를 격파하고 무장왜경과 대치 투쟁하다가 역부족으로 공은 당일 동지인 이정춘외 20여명과 함께 피체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니 당년 35세였다. 2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초지일관 굴복하지않고 애국지성을 발휘하시었다. 더욱이 출감후에도 동지를 규합하여 더욱 강력히 일제에 항거투쟁해오다가 감격적인 조국광복을 맞아하였다. 그러나 공은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와병중 서기 1946년 5월 27일 향년 62세에 서거하시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공의 숭고한 충절정신과 혁혁한 행적을 높이 인정하고 서기 1977년 10월 19일자로 건국포장이 추서되어기에 우리 향민은 향토사에 찬란한 공의 애국정신을 흠모하고 그 공훈을 기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향민의 뜻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우는 바이다.
공의 본명은 병주요 자는 원배며 호는 비암이시다. 본관은 장수이며 시조는 신라시중 황경이시며 조선조 세종시 명상 영의정 익성공 황희의 17세손이시고 우의정 호안공 황치신의 16세손으로 본 고장 신상면(현 유구면) 추계리에 낙향하신 통정대부 황만배의 10세손이시다. 공은 서기 1884년 11월 20일 추계리에서 부 세현공과 모 충주지씨의 독자로 탄생하시었다.
유년시부터 한학을 수학하시어 덕성을 닦았으며 특히 웅변에 능한 재질을 지니신 분이었다. 년기장성하여 밀양박공 용화의 독녀 병화여사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의장이요 차남은 의숙이다. 일찌기 공은 뜻한바 있어 진도교에 입교하여 지방 교주를 맡아 교령 손병희선생과 우국지념에 뜻을 같이하고 서기 1910년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경향 각지의 의사 제위와 그리고 인근 동지인 이정춘 김병헌 현우석 김상규 안태하 제씨등 30여인과 뜻을 같이하고 일제의 항거투쟁하던중 서기1919년 기미3월1일 교령 손병희선생으로 부터 독립선언감행의 밀명을 받고 즉각 본고장 공주 신상에서도 거사키로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각 동리에 전령을 급파하여 동월 14일 신상장날에 동지들과 더불어 군중500여명을 통솔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면내 각지를 순회하니 이에 합세한 자가 수천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격분한 장날 군중들은 왜경주재소를 격파하고 무장왜경과 대치 투쟁하다가 역부족으로 공은 당일 동지인 이정춘외 20여명과 함께 피체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니 당년 35세였다. 2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초지일관 굴복하지않고 애국지성을 발휘하시었다. 더욱이 출감후에도 동지를 규합하여 더욱 강력히 일제에 항거투쟁해오다가 감격적인 조국광복을 맞아하였다. 그러나 공은 옥고의 여독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와병중 서기 1946년 5월 27일 향년 62세에 서거하시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공의 숭고한 충절정신과 혁혁한 행적을 높이 인정하고 서기 1977년 10월 19일자로 건국포장이 추서되어기에 우리 향민은 향토사에 찬란한 공의 애국정신을 흠모하고 그 공훈을 기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향민의 뜻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