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 6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남강 윤용주 선생 기적비 안내비석
GPS상의 주소는 충남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 671이다.
애국지사 남강 윤용주 선생 기적비
포의로 국보난간(國步艱難)때를 만나 국망의 치욕도 광복의 감격도 분단의 고통도 모두 자유와 독립으로 정신하시다 끝내 동족상잔의 피화로 타계하신 의연한 민족정기가 여기에 고고하니 바로 애국지사 남강 윤용주선생이시다. 선생의 성은 파평윤씨요 호는 남강이니 우리 고장 금남 문암동에서 고종 21년 갑신에 군부참위 휘 제보공의 장남으로 태어나시다. 생래로 강직하신 선생은 6세에 서울에서 한학을 전수하시다가 20세에 다시 유구면 문금리로 이전하시다. 단기 4238년 을사늑약 이후 국운은 기울어 2년뒤 정미칠조약에 의해 군대마저 해산당하고 4243년에는 치욕적인 합방으로 아 조선왕조 600년은 종말을 고하니 이에 분개한 의혈청년 선생은 4246년 정한일 이성렬 사제 익주등 제공과 함께 순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그 군사장이 되시었다. 연이 나이와 같은 운동은 바로 누설되어 동지897명과 함께 왜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시었다. 그후 4248년 선생은 의병대장 이강덕과 사제 익주와 함께 항일을 위한 금강군을 조직
천수군과 천화군으로 편성하여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시니 가위 위수위화 대거항일을 전개하시다. 4250년에는 양한묵 사제 익주등과 함께 각 군사단체를 규함 독립군으로 재편성하여 3.1운동을 선도하시다. 4252년 4월 선생은 전 협 최익환 제 익주 등 제공과 대동단을 조직하여 자금 확보와 단원 모집을 담당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한일합방의 부당서을 통론하였으며 한일합방으로 인한 일본의 야욕의 팽배는 필시 아세아의 침략과 동양평화의 교란을 재래할것을 미국과 파리강화회의에 문서로서 경고주장하시다. 또한 대동단의 강령을 적극지지하여 전국에 조직망을 구축하는 한편 안국동 광장에서 제2의 독립만세를 결행할 자금조달과 유인물 살포를 위한 만반준비와 거사 인원 규합등 4246년부터 4252년 기미 독립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선생은 만사를 진두지휘하시다 피체되어 3년간의 영어의 몸이 되시다. 출옥후에도 국권회복의 단심으로 상해의 임정과 연락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대동신보 독립신문의 발간등 선생의 활동은 눈부시었다. 4236년 일본의 야욕이 극에 달하였을때 선생은 오직 조선독립의 일념으로 금광개발로 병력확보와 군수물자 조달에 전력하시다. 4287년 조국광복으로 상해임시정부가 환국됨에 백범 김구선생이 귀국하자 선생은 백범선생과 상무사를 조직 부령으로 피선되어 신탁통치반대운동과 통일정부수립에 진력하시다. 그러나 만사휴의라 4283년 6월 25일 민족동란으로 피신중이든 선생생은 동년 8월 9일 부인 곽동순여사와 아들 국현 조카 상현등 일가족이 인민군에 피납되어 한강백사장에서 무참히 종언하니 오호통재라 시에 선생 수 67세라. 그 후 대동단사건으로 판결문이 4324년
선생의 조카 정현씨에 의해 발견되어 그 익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다. 공주의 온누리는 이 고고한 의적앞에 조그만한 정성을 바치고자 바르게 살기운동 공주군 협의회 임길수회장과 이래하공주수의 노고가 담긴 문헌과 자료로 불영에게 청문하니 이는 독립기념관의 보람이요 오선근암선생의 추념 또한 절절이라 感已陰隲(감이음척)하여 불사히 명하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