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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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5-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민족혼 수호와 인재 육성에 힘기우리니 모두가 이 고장의 사표로 높이 받들었다. 선생은 부인 능성구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니 효성이 지극한 장남 경호는 아버님의 옥고에 상심하여 끝내 병으로 돌아가고 차남 성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청년운동에 헌신하였다. 장하고 빛나도다. 조상의 얼과 음덕이 후손에 이어짐이여. 오늘날 선생의 내외손이 모두 번창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조상의 뜻이 가풍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증손인 광휘는 청백리 표창으로 이 나라 이도의 본보기가 되었고 손인 근환은 육군 소장으로 국방의 중직인 사단장 정보사령관을 역임 두 차례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각 세계요로에서 크게 활약중이다. 선생께서는 서기 1943년 계말 12월 24일에 70세로 천수를 다함에 서산땅에 모셔졌다가 앞서 서기 1930년 경오 1월 29일에
타계한 부인과 함께 서기 1961년 신축 이곳에 합장하였다. 이제 선생이 가신 지 어언 반세기에 이르러 후손들이 뜻을 모아 그 빛나는 공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묘비를 세움에 있어 평소 존경해 마지 않는 손인 근환 장군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가첩과 유문을 살펴 여기 선생의 높은 뜻과 행적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한다.
정치학박사 월성 최창규 찬 안동 김응현 서
서기 1992년 임신 2월 20일 립
제 84943호 - 표창장 / 고 유석우
위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노력함으로써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이에 표창함
1992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이 증을 대통령 표창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문석
晉州柳公 晟浩 之墓(진주 유공 성호 지묘)
조국광복 운동에 몸 바치신 독립투사 류성호 선생께서 여기 고이 잠들어 계시다. 선생은 서기 1909년 3월 9일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구한말 선전고나을 지내신 아버지 석우공과 어머니 능성구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니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대승공 차달이시고 중시조는 그 9세손으로 본관을 진주로 한 진산군 인비이시다. 선생의 가계는 문무에 걸쳐 나라에 공이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선대인 춘추관대학사 정평공 구와 아드님인 보문관 직제학 겸(謙)은 2대에 걸쳐 청백리로 치정의 귀감이 되고 증영의정 삼도수군 통제사 충경공 형은 임진왜란 중 국란을 극복한 명장으로 그 위훈이 청사에 빛나며 아버님은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애국지사로 덕망 높은 선각자이시다. 이러한 충절이 면면이 이어져 온 자랑스러운 가풍속에서 성장한 선생은 천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언행일치의 행동인이시었다. 일찌기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선생은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진 강압과 착취에 울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독립투쟁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시었다. 선생은 급기야 1936년 9월 결연히 중국 대륙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상해 남경 방부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불행히도 1941년 7월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무려 보름 동안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기밀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충남 서산읍 석남리에 강제 압송하여 거주 및 활동을 10리 이내로 제한하고 선생의 일거일동 엄중감시하였다. 1941년 11월 일경의 체포 수감 기도를 류붕렬 서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알게 된 선생은 그들의 허점을 틈타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을 엄중감시하였다. 선생은 감격의 8.15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가슴 벅찬 귀국길을 뒤로 미룬 채 고려인민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안전과 권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다가 그해 12월에 그 곳 교민 전체의 염원이 담긴 청원서를 민주의원회장 이승만 박사에게 전하기 위하여 환국 도중 평양측에 발각되어 혹한 속에 2주간이나 수감 중 중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는 고초를 겪으셨
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 끝에 귀향한 선생은 건국사업의 기초가 건전한 이념과 투철한 국가관으로 무장된 청년의 육성에 있음을 통감하시고 모든 명리를 떠나 향리인 서산에서 김제능 류순식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청년운동에 힘쓰셨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함이여. 선생은 독립운동에 따른 모진 고초가 건강을 크게 해쳐 애석하게도 1950년 1월 19일 41세를 일기로 타계하시니 평소 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애국애족 정신을 우러러 따르던 동지들과 군민들의 뜻에 의하여 군민장으로 엄수되었다. 선생은 부인 광주이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니 독자인 근환 또한 아버님의 좌우명인 견리사의 견의사명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육군소장으로 사단장 정보사령관 등 국방의 중직을 두루 역임하고 두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후 사회 각 분야에서 중진으로 큰 업적을 남겨 놓았으며 자손들이 모두 번창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립투사의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의 눈물겨운 정성과 희
생이 스며있으나 파란 많은 선생의 생애에 있어 항상 뜻과 고난을 같이 하며 생계와 자녀교육에 힘쓰신 부인의 슬기로운 용기와 인고야 말로 존경스럽기 그지 없다. 어느덧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 사십 유여 성상에 이르러 아들 근항으로부터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비문을 요청하므로 일찌기 선생과 청년운동을 같이 한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추모의 정과 옛 감회를 금할 길 없다. 삼가 존중히 옷깃을 여미고 붓 끝을 가다듬어 선생의 높은 뜻과 숨은 행적을 밝혀 이를 후대에 전하는 바이다.
배 이항래 권사 서기 2005년 11월 9일 4시 소천 전 국회의원 류순식 찬 동방연서회 회장 김응현 서
서기 1993년 10월 11일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5-3 애국지사 유석우의 묘소를 찾았다.
다행스럽게 이곳 저곳을 찾아야 했었는데 주민이 이곳으로 안내해주어서 손쉽게 찾았다.
이곳 역시 해당 번지내에 있다.
有韓 愛國志士 宣傳官 晉州柳公 諱 錫瑀 之墓(유한 애국지사 선전관 진주유공 휘 석우 지묘)
예로부터 충의로 이어지는 진주유씨 일문은 호서의 우뚝한 충절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여기 옥녀봉 서남향 언덕에 선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오직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평생을 다 하신 애국지사 유석우 선생께서 고이 잠들어 계시다. 선생은 서기 1874년 갑술 9월 7일에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아버지 기승공과 어머니 안동김씨 사이에 독자로 태어나 명가의 기품을 이어받으며 성장하였으니 휘는 석우 자는 공무 본관은 진주로 시조는 대승공 차달이고 중시조는 그 9세손 진산군 인비이다. 선대를 살펴볼 때 학덕 높은 대학자 이도의 귀감인 청백리 경세의 정치가 국란극복에 앞장 선 무인 등 문무에 걸쳐 역사상 유공한 인물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춘추관 대학사 정평공 구와 보문각 직제학 겸(謙)은 대를 이어 청백리 반열에 올랐고 관찰사 공조판서를 지낸 정민공 진동은 정사에 크게 경륜을 폈을 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높은 의지를 이룬 대가이다. 또한 임진전란 중 이충무공과 더불어 전공에 빛나는 증 영의정 삼군수군통제사 충경공 형은 진충보국의 명장으로 공주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파조 세자 익위사 익위금사공 충걸은 철리에 밝은 석학이고 고조인 증 호조판서 재원과 증조인 수군절도사 상묵 조인 통덕랑 준검도 한결같이 고결한 인품과 덕망으로 추앙받았다. 이같이 빛나는 선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선생은 천성이 호방강직하고 위엄과 덕을 아울러 갖추었으니 일찌기 학문과 무예에 힘써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성충을 다하던 중 한일합방을 당하여 나라 잃은 통한에 잠긴 채 향리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러기 10개 성상 망국의 한 맺힌 선생은 기미 3.1운동이 일어나자 정희준 이우상 이홍규 제공과 더불어 결연히 일어나 황병주 일진과 합세 유구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그 여세를 몰아 유구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간악한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선생은 이 일로 곧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공주감옥에 갇혀 오랜 옥고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옥리들도 그 의연한 인격에 감탄했다 한다. 선생은 출옥 후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부득이 서산으로 이거하였으며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면서 일제 말기의 변절 심한 세태 속에서도 고고히 그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한의원을 차려 심오한 인술로 빈한한 병자를 무료로 돌봐주고 서당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