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247-4
- 탐방로그
- 당시 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송장배미 표지석과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위대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주시 웅진동 247-4 동학농민전쟁전적지송장배미(용못)를 찾았다.
동학농민전쟁전적지 송장배미
용못
이 연못은 1894년 10월 ~ 11월에 있었던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용못은 원래 큰 가무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제, 지금은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우금치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라 전한다.
용못
이 연못은 1894년 10월 ~ 11월에 있었던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용못은 원래 큰 가무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제, 지금은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우금치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라 전한다.
낮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밤에는 우리 동학군의 횃불이 타오르던 주리봉 스무차례 이상 싸워 피가 곰내골을 따라 가득 흘렀다. 금강을 바라보는 이곳 응달의 논배미에 열여덟구의 시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죽창과 맨손으로 싸우다가 누구 하나 거두는 이 없이 흙이 되고 물이 되었다. 스무 한해 전까지 논 임자였던 이상집 옹이 일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려 의로운 영혼들을 위로하였으나 이웃한 백제 사마왕 무덤과는 달리 내내 한서린 바람만 맴돌았다. 이제 겨례의 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기념물을 세운다.
겨레여 나라를 걱정하는 길손이여 잠시 발길을 멈추고 가신 님들의 넋을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길지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는 무명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힘차게 고개를 넘고 또 넘으려나.
동학농민전쟁 백육주년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
겨레여 나라를 걱정하는 길손이여 잠시 발길을 멈추고 가신 님들의 넋을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길지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는 무명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힘차게 고개를 넘고 또 넘으려나.
동학농민전쟁 백육주년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
낮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밤에는
우리 동학군의 횃불이 타오르던 주리봉 스무차례
이상 싸워 피가 곰내골을 따라 가득 흘렀다. 금강을
바라보는 이곳 응달의 논배미에 열여덟구의 시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죽창과 맨손으로 싸우다
가 누구 하나 거두는 이 없이 흙이 되고 물이 되었다.
스무 한해 전까지 논 임자였던 이상집 옹이 일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려 의로운 영혼들을 위로
하였으나 이웃한 백제 사마왕 무덤과는 달리 내내
한서린 바람만 맴돌았다. 이제 겨례의 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기념물을 세운다. 겨
레여 나라를 걱정하는 길손이여 잠시 발길을 멈추
고 가신님들의 넋을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길
지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는 무명의 죽음으로 말
미암아 힘차게 고개를 넘고 또 넘으려나.
동학농민전쟁 백육년
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우리 동학군의 횃불이 타오르던 주리봉 스무차례
이상 싸워 피가 곰내골을 따라 가득 흘렀다. 금강을
바라보는 이곳 응달의 논배미에 열여덟구의 시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죽창과 맨손으로 싸우다
가 누구 하나 거두는 이 없이 흙이 되고 물이 되었다.
스무 한해 전까지 논 임자였던 이상집 옹이 일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려 의로운 영혼들을 위로
하였으나 이웃한 백제 사마왕 무덤과는 달리 내내
한서린 바람만 맴돌았다. 이제 겨례의 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기념물을 세운다. 겨
레여 나라를 걱정하는 길손이여 잠시 발길을 멈추
고 가신님들의 넋을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길
지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는 무명의 죽음으로 말
미암아 힘차게 고개를 넘고 또 넘으려나.
동학농민전쟁 백육년
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전적지비 맞은편에 있는 조형물
앞에 인용했었던 사진에 보이던 조형물 앞에 풀밭 위의 팻말은 없어졌다.
용못
이 연못은 1894년 10월 ~ 11월에 있었던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용못은 원래 큰 가무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제, 지금은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우금치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라 전한다.
이 연못은 1894년 10월 ~ 11월에 있었던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용못은 원래 큰 가무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제, 지금은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우금치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라 전한다.
어린 학생들의 글들이 매달려 있었다.
여기로 내 남동생을 찾으러 왔어. 그런데 이 논이나 저 논이나 사람들이 쌀가마니 마냥 쌓여 있는데 누구 누군지 알 수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그냥 집에 돌아왔어. 그냥... 울면서 돌아왔어.
아마도 유족들의 증언을 옮겨 적은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집에 돌아왔어. 그냥... 울면서 돌아왔어.
아마도 유족들의 증언을 옮겨 적은 것 같다.
무명의 동학군들이시여, 부디 편히 쉬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