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建國勳章大韓民國章追敍愛國志士吳東振先生追慕碑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애국지사 오동진 선생 추모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애국지사 오동진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오동진 선생은 서기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출생하시었다. 배일사상이 강한 천품을 작었던 선생은 17세의 소년시절부터 일본의 만행에 항거하였으며 서기 1919년 기미3월에는 신의주에서 3.1운동에 참가하여 활약중 적의 체포?으로 만주로 운동의 본거지를 이동. 그곳에서 안병찬선생과 같이 군소독립운동단체를 통합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 암약하다가 다음해에 상해임시정부 군사부직할인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고 제2영장에 취임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서기 1922년 8월에
는 재만 대소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입법,행정, 사법을 통할하는 통의부가 설립되니 만주에 있는 독립군 목두가 이 군사부의 몇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선생은 본부에서 교통,재무 양부장의 중택으로 독립운동중 가장 어려움을 한몸에 떠 맡이시고 막대한 군자금조달에 심혈을 기우릿기었다. 익년 1월에는 다시 10여 군소단체를 정의부로 통합개편하고 군사부내에 의용군을 따로 편성하여 항시 국내 주요 일인기관의 파괴는 물론 주요인사와의 비밀공작을 전담하므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서기 1925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좌익계역까지도 독립운동전선으로 흡수통합시키고 이의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임하여 과감무쌍한 활약을 하다가 서기 1927년 12월에 통한하게도 적에게 체포되시었다. 독립운동 20년에 언제나 어려운 일은 몸소 실행하고 한번도 동지들에게 배우를 당한일이 없는 선생! 적의 판관도 그 탁월한 임품에 감복하였다는 선생! 우리독립운동사상 찬연한 장을 장식하였던 선생은 무기형을 받고 애것하게도 서기 1943년 어느날 조국광복을 목전에 두고 공주옥에서 55세를 일기로 천추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에 정부저서는 서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고장 어디엔가 묻히신 오동진선생의 혼령을 위무하고 구국일념의 빛난 충절을 우리의 역사와 더불어 후세에 기리고자 그 공적을 세겨 이비를 세움
1982년 공주군수 조기택 세움
오동진 선생의 위패는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001에 봉안되어 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1982년 공주군수 조기택 세움
오동진 선생의 위패는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001에 봉안되어 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