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출신 독립의열명사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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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침산리 179-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연기 출신 독립의열 명사숭모비
연기 출신 독립의열명사숭모비
고종병자때개명에 눈을 뜬 왜제가 감언이설과 무력위협으로 조일수교조규은 후침햑의 독아를 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권침탈에 영일없더니 을미보호조약으로 국권의 거반을 상실케되자 우국지사는 각지에서 발기하여 조약의 폐기와 국권의 회복을 주장하여 만반수단과 방버으로 운동을 벌렸으나 사태가 여의치못하매 귀중한 생명조차 홍모와 같이 희생하는 열사가 속출하더니 불과수년에 경술국치를 당하매 이천만 동포는 국적없는 노예가 디고 삼천리강토는 지도가 왜색으로 변하매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을 타도하고 국내외에서는 조국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할뿐아니라 국민된자는 누구나가 다같이 비분감개 절치부심을 발양하여 적수공권으로 왜적을 쳐부수고 독립을 ○도함은 물론 왜적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나라 귀신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생명을 끊는 의열인사가 다수발생하였으니 우리 지방인들 어찌 열외가 될수있으리요 하열 여러 선생들의 고절탁행은 그 찬란한 빛이 능히 일월과 같고 호국애족의 숭고한 얼은 가히 전체국민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도다. 오강표는 보성인이니 호는 무이재며 전간재 문인으로 학행이 到底(도저)하더니 국세가 일비하매 세사에 뜻이 없어 쾌쾌하며 공주명강산중에서 묻쳐달더니 을사국변이 일어나자 토적시를 지어 관찰사 이도재에게 바쳤으나 거절당하매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고 아편을 청인에게서 매음하였으나 무독함것이어서 기사회생하니 혹자는 광인이라 하더니 경술국치를 당하매 절명시와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격문을 짓고 공주향교에 가서 지은 글을 벽에 붙이고 일장대성통곡한후 강학루에 올라 목매어 자살하니 때는 음10월 16일이더라. 남면에 순절비가 있어 만인추앙의 대상이 되고 제3공화국에서 포상되여 길이 후손에게까지 명예가 미치니라. 최백영은 강화인이니 호는 연초라 학행이 특이하여 향천으로 가자통정대부하고 환로의 무상함을 깨닫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한하매 항시 침식불안으로 지내다가 무책을 자책하고 증왜시및 국망한시를 공주무성산하에 두고 보령성주산중으로 둔세하더니 익년 경술에 국치를 당하매 다시 살뜻이 없어 무연히 지내던중 당지헌병대서 왜제의 상치은사금 바등라는 통지가 있자 어찌 국적의 금품을 받으랴하고 결연 거절하니 박해가 자심하므로 풍한설야에 응급피신 천안광덕산중에서 초근목피로 연명중 천안헌병대게 탐지되어 체포 압송중 풍세들을 지나다가 대소변을 칭탁하고 그 놈들의 가석을 얻어 잠시 가작하다 그 눈을 피하여 큰 둠벙에 용약장신하니 그자들의 구출한바 되었으나 적개심을 품고 익일 조조에 절명하니 때는 갑인 음2월 10일이요 향년 79세더라

장재학은 결성인이니 호는 경암이요 전가재 제자니라. 학행이 유별나서 일반의 추앙을 받았는데 왜적의 침략으로 국세가 일비하매 항사 적개심을 품고 일언일동이 배일일식이더니 을사와 경술의 치욕이 있자 우국애족의 의분으로 왜적의 백성으로서의 성명을 공문서에 등재함을 불인하여 면사무소에서 관람하는체 민적을 파열투사하고 세금과 부역을 일절 거부하며 신생품은 불용하고 불복종 무저항주의로 일관하니 고도절해인 경상도 금도에 귀양으로 3년고를 치루고 서울 감옥에 구금된채 년여를 지내되 자작 송엽분으로 연명하다 급식이 들어오자 식기를 파열하여 파편을 呑下(탄하)하니 그 자들의 기계인출로 토사는 되었으나 토혈수승에 기사지경이었다. 석방되자 피골이 상접하여 인형을 잃었음으로 유지자가 자사요양수
개월에 생환하다. 당사하여 간재 선생은 의사로 조문을 올리고 일반인사들은 군내 유일한 배일거사라 칭찬하니라.
장재규는 재학의 실제니 그 행적이 형과 동일하여 완도로 귀양가서 1년 여를 고생하다 왜정 말기에 청주형무소에 무작정 예비 구속 중이라 하루는 금식하는 사기를 분쇄하며 파편으로 할복 자결코자 하였으나 날이 둔하여 미수에 그쳐 그자들의 극력시료로 소생하였다가 8.15의 광복으로 해방되니 세사인사가 다 난형난제라 칭송하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불국수도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평화가 회복되는 동시에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우리 조선독립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왓다하여 유지자가 모든 방법을 강구하든 중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를 고창하니 삽시간에 전 장안에 만세운동이 파급되고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체포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시에 수라장이 되니 불과 수일내에 삼천리 강토가 독립만세 운동장이 되고 이천만 동포는 모두 독립만세 운동원이 되었다. 극악무도한 왜병들은 도처에서 방화 살인 구타 체포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수백만 명이 희생물이 되고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그 광범하고도 치열한 민족운동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뿐아니라 희생의 처참함도 또한 공전절후의 생지옥이였던 것이다. 우리 지방에서도 모사에 당하여 동지간에는 동생동사할 것을 굳게 맹세도 하고 노소간에는 책임을 전담할 뜻을 분명히 약속하기도 하였고 거사에 있어서도 이 동리서는 자발적으로 백주에 앞 강변에 운집하여 목이 터지도록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저 지방에서는 선도자의 영솔하에 총동원하여 밤중에 높은 산에 올라 횃불을 휘두르고 화토불을 피우고 닭이 울 때까지 천지가 진동토록 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그 양상은 다기다양하였으나 숭고한 독립정신으로 행동한 점은 동일한 것이였다. 군내 방방곡곡 만세운동이 일지 않은 곧이 없고 군민 모두가 독립운동자 아님이 없었으나 하기 여러 의사들은 투철한 독립정신과 극렬한 만세운동으로 왜병에 체포되여 혹
독한 사형과 체형으로 간혹 열과 기력이 다 빠져 허수아비로 일생을 마치기도 하였으니 그 처절한 광경은 목불인견이였으며 천인공노할 학대로 옥고를 마친 후의 피골이 상접한 참상 어찌 필설로 다할 도리가 있겠는가. 실로 인류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참사가 전개되었든 것이다. 우리 군민은 다 같이 옷깃을 가다듬고 그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또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상기하면서 지성에서 우러나는 추모의 정을 아낌없이 다 바쳐야 할 것이다.
이수욱은 전의지방 운동 주모자로서 고등법원서 징역 1년 6개월 복역하다 혹독한 사형으로 손과 발가락이 탈락하여 종신병자가 되였고 추경천은 1년 2개월, 추득천은 1년 고법판결로 옥고를 치루었다. 홍일섭은 조치원지방 주동자로서 사적비가 있으며 유시풍과 같이 1년 징역에 김봉식, 조의순, 추영복, 임덕문, 이덕민은 징역 10월, 장홍진, 장기민, 윤상원, 이장희, 이광희, 정원필, 윤자벽, 윤자훈, 이수양, 윤상돈은 6개월 징역형에 임헌규는 6개월 2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유진광, 임희수, 임헌상, 윤상은, 윤자명, 이규영, 이상건, 정상복은 태형 90도에 임숙명, 임만수는 60도로 육체형을 받으니 재야 법조계는 소요사건으로 주장하였으나 가중처벌키 위하여 복심 및 공주지방법원은 모두 보안법 위반죄를 덮어씌웠든 것이다. 윤봉균은 중학생의 신분으로 백방노력하여 독립선언서를 입수 이를 다수 복사하여 주야불철 공주와 연기 지방을 왕래하며 살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출판법 위반죄로 공주지법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정낙진은 소년의 몸으로 대망을 품고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철도학교에 입학 수학 중 민족적 차별 대우에 분노를 품고 약소민족에 관한 저서를 다류 탐독 독립사상을 배양하던 중 선각자 현광조와 접선 우리조선독립운동 구룹을 조직 백방 활동하다 1942년 3월에 전원 검거되여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19세 미성년으로 동경소년원에 수감 천신만고를 적다. 왜제의 8.15항복으로 석방되니 3년 5개월 만에 광명의 천지를 보게 되다. 강금종은 20세 청년으로 도일 대판경판상업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후 적색사회주의를 연구 우리 민족의 살길은 조국독립에 있음을 자각 왜정의 조선에 대한 차별적 식민정책에 민족적 반감을 가지고 독립을 희구하는 동지 김봉각과 결탁 백방 운동을 전개하다 1942년 10월에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에 구류 200일 통구형에 처해서 옥고를 치루다. 김재황은 왜정 말기에 연전학생대표로 조국독립운동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여 비밀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9월에 검거되어 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에 구류 400일 통구형의 판결로 복역하다. 박노일은 일본 유학 중부터 조국광복운동에 참가한 후 귀국 종제와 같이 도만 임시정부 소재지로 향하다 북경에 도착 광복군 지하공작대와 접선 공작대책으로 다년간 활동 중 수차 왜군에 체포되여 천신만고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여 다대한 공적을 쌓았고 1946년 봄 임정요인과 귀국하였는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자 표창을 받다. 황갑수는 유시부터 향리 독립운동가와 학교에서의 민족사상가의 감화를 받아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왕성하던 중 1944년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여 중국에 파견된 후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 왜진에서 탈출 광복에 입대 우군과 같이 양차에 왜병 10여명을 ○살하여 그 공으로 상위로 진급되고 백방활약하다 1946년에 임정요원과 귀국하니 청년 독립운동가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
군수 양후석 및 박종수는 열성으로 그 소임을 다하더니 향교와 사찰 등 유형문화재를 중건 또는 신장으로 면모를 일신케하는 일면 무형문화재인 위인 열사의 얼을 선양키 위하여 본 사업추진에 거대한 재정을 ○출케하고 백방으로 편익을 공여하며 국회의원 이준섭 공감을 가지고 사재를 다액 희사하니 다같이 그 공이 크다 할지며 추진위원 역시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응분의 공헌을 쌓아 유종의 성과를 거두게 한 덕분 또한 적지 아니하노라.
위원장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임헌국
위원 전 한조환 전 김학준 전 김청환 전 홍종선 전 임상전 전 윤석규 전 이덕로 강금동 장영진 임재신 임익수 박남규 신혁범
특헌국회의원 겸 헌법위원 강도 최운교는 짓고
독립유공자 송은 박길화 손 일규는 쓰고
국회의원 이준섭은 전함
기미 3.1운동회 갑절 연기 출신 독립유공자 기념사업회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