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열 의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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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 16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淸風金公 奎悅 義烈碑(청풍김공 규열 의열비)
國家를 위하여 난적을 토벌함은 民族의 큰 의리이다. 예로부터 忠義에 울분한 선비가 어느 때 없을까만은 사세의 大小와 緩急에 따라 操身함이 혹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하나 그 수립한 의리만은 한가지다. 아! 지난 庚戌년 國恥는 실상 우리나라 千古에 없는 大變이다. 三千里강토가 다 왜놈의 손에 들어가고 五百年 예의가 졸지에 오랑캐와 짐승의 영역으로 화했으니 臣民된 자 창자에 가득찬 의혈이 各處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다가 몸을 망치고 집안이 파산된 자를 어찌 다 세일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연기군내에 士人인 金公 奎悅의 字는 元習이니 淸風人이라.
始祖는 고려조에 淸城府院君인 諱大猷요 中宗때에 공신작을 받은 諱友曾의 十三代孫이며 虞候인 諱 鍾義는 古祖이고 廣淵은 曾祖이고 東乙은 祖父이고 蘭性은 부친이요 全州李氏는 모친이다.
公이 高宗 丁亥(1887) 9월 5일에 출생하니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강직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눈앞에 시변이 망극함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서 동지 오백여인을 규합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首唱하다가 드디어 적의 총대에 심하게 맞아 유혈이 낭자하고 숨이 끊어질 지경이라 賊이 버리고 가다.
前日에 族姪인 鎭漢이 독립운동으로 滿洲에 체류하다가 군자금 조달차로 고향에 돌아오니 田畓萬餘坪을 매각하여 수용케하고 다음해 구수인 南총독이 충청도 시찰사로 조치원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듣고 때를 맞추어 칼을 품고 죽이려하다가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절치부심하여 두 아들의
나이가 26, 24세 되도록 출생계를 아니하고 新學校에 보내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왜놈의 상품은 절대로 쓰지 않고 자손에게 衣髮을 보존케 명하였다.
이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갖은 탄압을 받아오던 중 어느 날 강제로 체포되어 늑삭을 당하니 낙담하며 이 치욕을 받아가며 구차이 살면 무엇하리요하고 문을 걸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코저 하거늘 家人과 친우들이 간곡히 만류하며 이 臥薪嘗膽의 때를 당하여 죽으면 여운이 없는 일 어찌 이토록 하는가 하니 한참만에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 曰 그러면 구차한 목숨이 있는 날까지 맹세코 왜적의 멸망을 보리라하더니 그럭저럭 해가 지나 乙酉光復을 맞이하였으나 남북이 분단되여 만족치 못하였다.
이로부터 前日 항적한 사실은 일체 입을 열지 않고 手筆로 韓日江華議約과 馬關條約 列國辨明書 및 皇后를 弑害한 일이며 擧義抗日 韓日合倂 保護條約 强制締結 勉菴崔先生의 討罪文 등 여러가지 문자를 일일히 기재하고 남은 여생을 억울하게 지내다가 戊戌 11월 13일에 天壽를 마치니 享年이 72세였다.
遠近의 조문객이 통곡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配는 德水李氏와 延安金氏니 墓는 新安後麓에 3位 合窆하다.
2子를 두었으니 鎭武와 鎭守요 孫男에 용영 세영 명영 경영과 녀에 이은석 홍정일 박의신 손영주는 장방출이요 창영 조영 재영과 녀에 유기두 곽영신 전만수 유인화는 차방출이며 冑曾孫은 상민이요 다음은 不錄한다.

아~공같은 義烈은 능히 악한 자도 청염케 할 수 있고 게으른 자도 수립케 할 수 있을 것인데 탕진한 나머지 자손도 힘이 없고 士林도 방관하여 于今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껏 포양의 典이 없더니 어느 날 나의 옛 친구 前典校였던 張佐鎭甫가 공의 行狀 및 手記와 3백여명 竪碑同意書를 갖이고 成均館을 찾아와 말하기를 이 일이 비록 늦었으나 生等이 鄕列에 살면서 의리를 묵과할 수 없은즉 관장의 紀文을 원하노라 하니 내가 그 때 사실을 참아 말할 수 없더니 오늘날 請文에 있어 한편으로는 공의 울분한 義烈을 찬동하고 한편으로는 典校의 闡美하는 성의에 감동하며 또한 우리 선조께서 토적하신 고충을 생각하니 여러모로 헤어리건대 결국 不文으로 사양할 수 없어 이에 行狀에 의해 서술하고 계속해 銘을 지으니 銘하여 가로되
장하다 김공은 청풍의 이름난 家閥이다. 지키는 결심이 굳고 정확하니 그 충절이 꺾이지 않았다. 국변이 망극하니 의혈이 창자에 가득찼다. 원수를 갚으려는 일념에 가정의 군색을 돌아보지 않았다. 구차한 목숨이 붙어 있다면 적의 멸망을 맹세코 보리라 성패와 利害는 힘으로 결단할 수 없다 내가 이에다 銘을 지어 후인의 반렬에 밝게 보이노니 웅장한 비석에 行人도 반드시 공경할 것이다.

대한 광복후 57년 신사 동지달에
전 독립기념관장이고
현 성균관장인 月城 崔昌圭는 지음


비문및 안내문은 지사의 손자이신
청주외고 교사 김조영선생이 보내주셨습니다.
나이가 26, 24세 되도록 출생계를 아니하고 新學校에 보내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왜놈의 상품은 절대로 쓰지 않고 자손에게 衣髮을 보존케 명하였다.
이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갖은 탄압을 받아오던 중 어느 날 강제로 체포되어 늑삭을 당하니 낙담하며 이 치욕을 받아가며 구차이 살면 무엇하리요하고 문을 걸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코저 하거늘 家人과 친우들이 간곡히 만류하며 이 臥薪嘗膽의 때를 당하여 죽으면 여운이 없는 일 어찌 이토록 하는가 하니 한참만에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 曰 그러면 구차한 목숨이 있는 날까지 맹세코 왜적의 멸망을 보리라하더니 그럭저럭 해가 지나 乙酉光復을 맞이하였으나 남북이 분단되여 만족치 못하였다.
이로부터 前日 항적한 사실은 일체 입을 열지 않고 手筆로 韓日江華議約과 馬關條約 列國辨明書 및 皇后를 弑害한 일이며 擧義抗日 韓日合倂 保護條約 强制締結 勉菴崔先生의 討罪文 등 여러가지 문자를 일일히 기재하고 남은 여생을 억울하게 지내다가 戊戌 11월 13일에 天壽를 마치니 享年이 72세였다.
遠近의 조문객이 통곡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配는 德水李氏와 延安金氏니 墓는 新安後麓에 3位 合窆하다.
2子를 두었으니 鎭武와 鎭守요 孫男에 용영 세영 명영 경영과 녀에 이은석 홍정일 박의신 손영주는 장방출이요 창영 조영 재영과 녀에 유기두 곽영신 전만수 유인화는 차방출이며 冑曾孫은 상민이요 다음은 不錄한다.

아~공같은 義烈은 능히 악한 자도 청염케 할 수 있고 게으른 자도 수립케 할 수 있을 것인데 탕진한 나머지 자손도 힘이 없고 士林도 방관하여 于今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껏 포양의 典이 없더니 어느 날 나의 옛 친구 前典校였던 張佐鎭甫가 공의 行狀 및 手記와 3백여명 竪碑同意書를 갖이고 成均館을 찾아와 말하기를 이 일이 비록 늦었으나 生等이 鄕列에 살면서 의리를 묵과할 수 없은즉 관장의 紀文을 원하노라 하니 내가 그 때 사실을 참아 말할 수 없더니 오늘날 請文에 있어 한편으로는 공의 울분한 義烈을 찬동하고 한편으로는 典校의 闡美하는 성의에 감동하며 또한 우리 선조께서 토적하신 고충을 생각하니 여러모로 헤어리건대 결국 不文으로 사양할 수 없어 이에 行狀에 의해 서술하고 계속해 銘을 지으니 銘하여 가로되
장하다 김공은 청풍의 이름난 家閥이다. 지키는 결심이 굳고 정확하니 그 충절이 꺾이지 않았다. 국변이 망극하니 의혈이 창자에 가득찼다. 원수를 갚으려는 일념에 가정의 군색을 돌아보지 않았다. 구차한 목숨이 붙어 있다면 적의 멸망을 맹세코 보리라 성패와 利害는 힘으로 결단할 수 없다 내가 이에다 銘을 지어 후인의 반렬에 밝게 보이노니 웅장한 비석에 行人도 반드시 공경할 것이다.

대한 광복후 57년 신사 동지달에
전 독립기념관장이고
현 성균관장인 月城 崔昌圭는 지음


비문및 안내문은 지사의 손자이신
청주외고 교사 김조영선생이 보내주셨습니다.
발기위원회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리 160-1 삼거리 김규열 열사 의열비를 찾았다.
김규열 열사는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는 안내판이 있었던 모양인데 안내판은 찾을 수 없다.
淸風金公 奎悅 義烈碑(청풍김공 규열 의열비)

김규열(金奎悅) 1887년 9월 5일 생. 1958년 음11월 13일 졸.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니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일본이 나라를 강점하자 신안, 서창, 침산, 봉산리 주민을 규합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다 왜경에게 맞아 생사가 경각이라 내버려져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으며 전답 10,000여평되는 전재산을 매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미나미 총독을 조치원역에서 살해하려다가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창씨 개명과 자손들을 호적에 입적을 거부하며 아무리 궁핍해도 왜적 상품을 일체 사용치 않으니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강제로 끌려가 상투를 잘리우고 흰 옷에 먹물을 칠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오로지 항일운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이에 선생의 구국업적을 충남북 300여 유림이 칭송하여 의열비를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