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 121-2
- 탐방로그
- 장재학 선생은 일제의 민적조사와 납세정책에 저항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유공자로, 장기민, 장홍진 선생과 함께 육영재에서 수학한 결성 장씨 가문의 사람이다. 현재 장재학 선생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의사 경암 선생은 본관이 결성이요 휘는 재학 자는 도삼이며 경암은 호이다. 시조는 고려 충헌공 휘는 정필이요 호는 포음이며 중조는 려조 평장사 휘는 하요 호는 청계이다. 수의망복하고 추대 결성군하다. 조는 동식 고는 태철인 바 단기 4195년 조선조 철종 임술 7월 12일 충남 연기군 동면 예양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청계 가문의 전통적인 유음을 받아 유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인품이 비범하여 청렴과 정직은 타고난 품성이었으니 신의와 덕망으로 세인 앞에 우뚝 서서 당대의 유림들로부터 끝없는 추앙을 받았다.
단아하고 고매한 풍모는 강직한 선비정신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으며 엄숙한 기상은 범인이 쉽게 범접하지 못하였다. 계제 재규로 더불어 한말의 석학 간제 전우 선생 문하에 수학하였으니 학문의 깊이와 수신의 품위가 달도지경이어서 명성이 널리 회자하였다. 4234년 경술에 일본이 간악한 수법으로 한일합방을 강행하자 선생은 멀고 먼 서울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고 국치를 앉아서 당하는 자신에 실망한 나머지 서단을 버리고 사문을 떠나 통한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일본은 장차 한민족의 뿌리조차 말살하기 위하여 4248년 을유에 우리의 민적(호적)을 일식으로 고치니 이에 분개하여 면사무소에 비치된 자가의 호적을 찢어
단아하고 고매한 풍모는 강직한 선비정신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으며 엄숙한 기상은 범인이 쉽게 범접하지 못하였다. 계제 재규로 더불어 한말의 석학 간제 전우 선생 문하에 수학하였으니 학문의 깊이와 수신의 품위가 달도지경이어서 명성이 널리 회자하였다. 4234년 경술에 일본이 간악한 수법으로 한일합방을 강행하자 선생은 멀고 먼 서울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고 국치를 앉아서 당하는 자신에 실망한 나머지 서단을 버리고 사문을 떠나 통한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일본은 장차 한민족의 뿌리조차 말살하기 위하여 4248년 을유에 우리의 민적(호적)을 일식으로 고치니 이에 분개하여 면사무소에 비치된 자가의 호적을 찢어
서 불태워버렸다. 이로 인하여 일헌에 체포당해 조치원 헌병대에 인금되어 20여 일 동안 온갖 고문 끝에 공주형무소에 수감 악랄한 체형도 극복하고 교활한 회유도 불응하므로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재판을 받아 1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도 그 정절은 추호도 변하지 아니하고 식기(접시)를 깨어 자결을 기도하였다가 실패되자 오히려 감시만 더욱 심해지고 옥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5개월의 형기 연장 통보를 받았다. 그 후에도 또 자결을 기도하여 사경에 이르자 당황한 형리들은 미음을 억지로 마시게하여 명을 유지시켰다. 형기를 마치고 귀가한 선생은 날이 갈수록 배일사상이 공고하여 일절의 납세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인들이 만든 기차와 자동차도 타지 않고 고무신도 신지 않는 인고와 자학으로 오직 항일운동만이 철두철미하였다. 4249년 병진에 수많은 일헌이 들이닥쳐 선생 일가가 보안법을 범했다는 구실로 선생은 전남 고흥군 거금도로 아우인 재규는 완도군 소안도로 아들 화진은 제주로 각각 유배당했다. 4251년 무오 11월 18일 3년 유배 생활에서 풀려 환향하였으나 심한 여독으로 4253년 경신 정월 4일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니 향년 59세였다.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당곡리 자좌원에 안장하였다. 간옹이 선생의 항일 행장을 찬양하여 의사라 특서하니 그로부터 세인들도 선생을 의사로 일컫게 되었으며 장씨 대동보와 연기군지 및 충남도지에 선생의 항일투쟁사가 상세히 등재되었고 독립기념관에도 보관되어있다. 재규는 호가 정암이다, 4215년에 출생하여 선생의 영향을 받아 항일행적이 투옥과 자결미 수등 그야말로 그 형에 그 아우라고 광복 후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의 장자 화진도 고숙과 같이 항일투쟁을 벌였다. 손은 낙민이오 증손은 운표 광표 순표이고 정암의 자는 달진 손은 낙홍 낙단이다. 선생이 옥중에 계실 때 아우 정암이 문후를 갔었는데 선생이 아우를 보고 선현의 말씀에 이로움이 적고 의로움이 많은 자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안하다 하였으니 지금 내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안하다 이는 곧 의로움이 많은 바니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見利思義(견리사의)의 정신이요 오직 구국일념 속에 일생을 마친 고결한 의지이다. 실로 선생은 절의염퇴(節義廉退)를 겸비한 위인으로 우리나라 근세사의 별이었다. 선생 형제는 포의한사(布衣寒士)로서 그 행장이 금화사현지의에 비견할만하고 최면암의 절식과 송연재의 앙약과 민규정의 복검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동문 임장우가 칭예하였다. 이제 조국은 광복되어 어언 40여 성상 선생은 가고 선생의 항일정신만 남아있으니 그 숭고한 애국 충정을 후세에 길이 남기어 만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여기에 비를 세우는 바이다.
단기 4321년 무진 10월 일
글 장욱순, 글씨 송승춘, 협찬 국회의원 이인구, 동면장 안순근, 주강내레미콘대표이사 김고성
건립추진위원장 장영진, 위원 김재인 김재봉 도정수 오벽균 김직수 장기무 윤일선 장헌진 장대진 장좌진 나창수
글 장욱순, 글씨 송승춘, 협찬 국회의원 이인구, 동면장 안순근, 주강내레미콘대표이사 김고성
건립추진위원장 장영진, 위원 김재인 김재봉 도정수 오벽균 김직수 장기무 윤일선 장헌진 장대진 장좌진 나창수
연동면 예양리 121-2 예양1리 마을회관 입구 경암 장재학 선생 의열비를 찾았다.
鏡菴 張先生 義烈碑(경암 장선생 의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