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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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21-14
탐방로그
애국지사 유익수 선생의 묘소는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21-14 정재초등학교 뒤 정수장 입구 주차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정수장 주차장 앞에 있는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과 공적사항 안내판에서 조금 내려가자 바로 묘소가 보였다. 하지만 철망이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바로 들어갈 수 없었고, 옆 농원의 양해를 구하고 철망을 넘어서 들어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수장 주차장 앞에 있는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과 공적사항 안내판에서 조금 내려가자 바로 묘소가 보였다.
철망이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들어갈수가 없었다.
옆의 농원에서 묘소 위치를 알려주셨던 지사님의 고손자분께 양해를 구하고 철망을 넘어서 들어갔다.
애국지사유익수선생지묘
선생은 진주유씨로 시조의 휘는 정이시고 고려조의 금자공록 대부 중서령좌우위 상장군의 25대손이 되시며 휘는 익수이시고 자는 여겸이시며 서기 1870년 12월 29일 안산 부곡에서 출생하시다. 선생은 기골이 엄정하시고 천성이 기백과 의협심이 특히 강하시었다. 선생은 기미3.1운동 당시 조국광복의 일념아래 결사 맹서하고 동지들과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시었다. 면내의 이봉문 김병권 윤동욱 홍순칠 군자면의 강경식동지들과 합세하여 3월 30일 수암군 자양명의 군중을 취합하여 대한독립만세란 대기치를 앞세우고 선두에서 지휘 군중으로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절규케하였다. 천지가 진동하고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남부에서 부터 각 부락
을 순회 안산읍을 향하여 돌진하니 중도에서 호응합세한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2,000여명에 달하였다. 일경춘사부장과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등이 혼비백산하여 겁결에 뛰어나와 대한독만세를 외쳤다. 면사무소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향교를 거쳐 면내 각처를 돌며 시위하니 우리의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각성케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선생은 그 다음날인 3월 31일 반월면에서 시위를 벌이니 많은 사람이 호응합세하여 각 부락을 돌며 시위를 벌이었으며 그 여세로 남양까지 진입하니 그 위세는 충천하였다. 선생은 시위가 사작할 무렵부터 군중들이 몽둥이와 돌을 몸에 지닌것을 발견하자 크게 소리쳐 건물이나 기물은 모두가 우리 대한민국의 재산이니 하나도 파손치말라고 호령하시니 군중은 일제히 버리었다. 또 선생은 봉기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하셨으니 족손되는 유철형등 4,5명의 청년을 시키어 성포리 노적봉에 숨어서 태극기 수천매를 제작케 하였고 사재를 털어 동지와 군중에게 주식을 제공하시었으며 각부락마다 높은 산정에 봉화를 올리게 하시니 그 화염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선생은 서기 1919년 4월 5일 월파리 자택에서 태연자약한 자세로 일군경에게 피체되니 그해 5월 27일 보안법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으나 여서인 김정규의 주선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8월 31일 1년형의 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선생께서는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고로 6년을 고생하시다 서기 1926년 4월 18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다. 서기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으심.
을 순회 안산읍을 향하여 돌진하니 중도에서 호응합세한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2,000여명에 달하였다. 일경춘사부장과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등이 혼비백산하여 겁결에 뛰어나와 대한독만세를 외쳤다. 면사무소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향교를 거쳐 면내 각처를 돌며 시위하니 우리의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각성케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선생은 그 다음날인 3월 31일 반월면에서 시위를 벌이니 많은 사람이 호응합세하여 각 부락을 돌며 시위를 벌이었으며 그 여세로 남양까지 진입하니 그 위세는 충천하였다. 선생은 시위가 사작할 무렵부터 군중들이 몽둥이와 돌을 몸에 지닌것을 발견하자 크게 소리쳐 건물이나 기물은 모두가 우리 대한민국의 재산이니 하나도 파손치말라고 호령하시니 군중은 일제히 버리었다. 또 선생은 봉기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하셨으니 족손되는 유철형등 4,5명의 청년을 시키어 성포리 노적봉에 숨어서 태극기 수천매를 제작케 하였고 사재를 털어 동지와 군중에게 주식을 제공하시었으며 각부락마다 높은 산정에 봉화를 올리게 하시니 그 화염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선생은 서기 1919년 4월 5일 월파리 자택에서 태연자약한 자세로 일군경에게 피체되니 그해 5월 27일 보안법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으나 여서인 김정규의 주선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8월 31일 1년형의 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선생께서는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고로 6년을 고생하시다 서기 1926년 4월 18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다. 서기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으심.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자주독립정신고취와 지역주민의 충효사상 앙양을 취지로한 정부위 지원을 받아 묘역을 단장하게되었음.
서기 1985년 3월 28일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21-14 정재초등학교 뒤 정수장 입구 주차장 아래 애국지사 유익수의 묘소를 찾아가고 있다.
왼쪽이 정재초등학교이다.
유익수(柳益秀) : 의병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유원형이다. 1870(고종 7)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출생으로 3.1운동 당시에는 지금의 상록구 월피동(부루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유익수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0일 능곡리의 윤병소, 와리의 홍순칠, 화정리의 김병권, 수암리의 이봉문, 산헌리의 윤동욱등과 함께 비석거리에서 인근 18개 동리 2,000여 명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읍내의 향교, 면사무소, 보통학교등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며 총을 쏘려 하자 흥분한 군중들의 시위가 과격해지므로, 폭력의 자제를 호소하여 평화적 시위가 되도록 하였다. 유익수는 다음날에도 반월면 장날을 이용하여 주민 600여 명과 함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에서도 시위가 과격해지자 "건물이나 기물은 우리 민족의 재산이므로 파손하지말자."라고 호소하여 평화적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같은 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6년여를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6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