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수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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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나성리 59-1
탐방로그
세종시 연기면에 위치한 임대수 의병장의 공적비를 찾아왔다. 이 비는 임대수 의병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연기군이 결성한 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1999년 8월 15일, 임대수 생가 입구 근처에 건립되었다. 현재 임대수 의병장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어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將 林大洙 功績碑(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義兵將 林大洙 功績碑(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의병장 임대수는 꺼져가는 조국을 지키려고 항거했던 애국지사이다. 그로인해 연기지역에서는 일본에 항거하는 의·열사가 줄을 이었고 3·1만세운동이나 독립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 이의 결실로 해방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를 있게 해 주었다. 그는 1911년 6월 16일 공주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전사하여 그 곳에 매장되었다가 1982년 6월 19일 공주 조기탁 군수의 도움으로 공주 장기면 금암리 공원묘원에 이장되었고, 1997년 10월 16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셨다. 그러나 우리 연기군 내에서는 그의 업적이나 행적을 표기한 유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군내 뜻있는 분과 단체가 그의 업적을 기리자는 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9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임대수 생가 입구인 이 곳에 삼가 공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추진위원장 : 강정현(금남농협협동조합)
추진부위원장 : 장영(조치원문화원장), 임창철(종촌벽돌공장대표)

추진단체
연기 향토사연구소(소장 정해영) 연기군 노인회(회장 이상은) 연기군시우회(회장 유진숙)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연기군협의회(회장 오운교) 안동김씨연기종친회(회장 김해연) 문화류씨치원공종중(회장 류기성) 조치원신용협동조합(이사장 이기봉) 농협중앙회연기군지부(지부장 최종구) 전의농업협동조합(조합장 홍종원) 남편농업협동조합(조합장 정창규) 바르게살기운동금남면위원회(회장 이장규) 서면이장단협의회(회장 홍성욱) 남면이장단협의회(회장 임만수) 서면남녀새마을협의회(회장 홍순범, 김남기) 남면남녀새마을협의회(회장 황정익. 김순익) 금남선우회(회장 최형석)
추진단체
전의농악대(회장 황경득), 남면지역총화협의회(회장 김관수), 금남덕진풍물패(회장 박정식) 부안임씨청년화수회(회장 임현배), 부안임씨보본공파종증(회장 임재완), 부안임씨전서회(회장 임헌교), 남면자율방범대(대장 황인산), 금남금오건설(대표 임헌옥), 남면정해생회(회장 현상철), 남면의용소방대(대장 이완수), 남면농업경영인연합회(회장 이용현), 남면종촌3리노인회합창단(회장 오순창), 남면송담2리노인회(회장 임헌풍), 남면송담1리주민일동(이장 임봉수), 남면연우회(회장 임재경), 남면송담2리주민일동(이장 임현만), 남면연기석재(대표 임승철), 남면광명건설(대표 임정엽), 남면새마을회일동, 연양17회연기동문회(회장 임영택), 일미농산(대표 오영철), 형제칼라사진관(대표 오영복)

추진위원
박희부(14대국회의원), 고진광(재경향우회장), 윤석규(전의고적보존회장), 임택수(삼락회 회장), 김성배(조치원읍), 조재구(엽서문학 발행인), 맹일관(서면후계자농원대표), 박연옥(전동면 보덕리), 이필선(남면 방축리 이장), 최익환(방축어린이집원장), 임형묵(전교장 선생님), 최병식(운주문화연구원장), 이희주(종촌신성양복점대표), 윤종구(청소년보호관찰연기군협의회장), 이신행(서면 면장), 임외수(양화2리 이장), 임봉수(금광면영대리), 장영석(성원문화사 대표), 임방수(종촌대동상호 대표), 임동일(공주해병대전우과장), 임영달(남면 송담2리), 류기범(남면농담2리)
임현각(남면 양화2리), 임완수(연기군청 도시과), 임정철(조치원고등학교총동창회부회장), 유문식(시민농업협동조합장), 김웅기(조치원농업회생조합장), 채규식(동면농협협동조합장), 연당 한상호(송촌리) 임재덕(서면 총무담당)

추진주관 :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지부장 이덕산), 연기향토박물관(관장 임영수)

후원 : 연기군(군수 홍순규), 부안임씨전서공파종중(회장 임광수)
의병장 임대수(1882.2.12~1911.6.16)는 부안인이다. 고려후기 연기 입향 시조인 공조전 서난수의 19대손으로 충남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학수이고 자는 호경으로 어려서부터 정의심이 강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항거투쟁할 것을 결심하였고 1907년 정미7조약이 늑결된 후 구 한국군마저 해산되자 그는 공주 당암의 동지 권정남과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첫싸움읓ㄹ 벌였다. 그후 직산 경무소, 은진, 정산 등의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1908년에는 당진, 청양, 비인, 한산, 임천, 면천, 신창, 아산, 평택 등지의 19개 군을 돌면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구속된 수백인의 의 지사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1911년 6월 16일 공주군의 당면 태산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서 임대수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애국지사이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1980년 8월에 건국포장을 1990년 12월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남면 종촌리에 손자 임정묵이 살고 있다.

1999. 8. 15
글 지은이 : 강주현
글쓴이 : 김재산
자료제공 : 광복회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59-1(세종시 나성동 59-1) 임대수 의병장 공적비. 저 위를 가르친다.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임대수 의병장은 1882년 충남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항거를 결의하였고,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는 등 충남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리다 1911년 6월 16일 공주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셨다. 임대수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1999년 8월 15일 이 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