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380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留鄕別監趙公武彬, 孺人金海金氏之墓(유향별감 조공 무빈, 유인 김해김씨 지묘)
공 한양인 중서 휘 지수 후예 입도조 교수 관 휘 방좌 12대손 가선 겸 좌수 휘 용하 제5자 배 김해김씨 생 3남 장자 병주 중 병률 말 병남 장손 우홍 정화 헌삼 중 우정 우평 증손 창전 창영 화남 연일
공 묘 조수경 구분악 북향
공 망 9월 10일, 배 정월 11일
공 묘 조수경 구분악 북향
공 망 9월 10일, 배 정월 11일
25-13-4
애국지사 訓長(훈장) 漢陽趙公 武彬之墓(한양조공 무빈지묘)
애국지사 訓長(훈장) 漢陽趙公 武彬之墓(한양조공 무빈지묘)
25-13-4
애국지사 訓長(훈장) 漢陽趙公 武彬之墓(한양조공 무빈지묘)
애국지사 訓長(훈장) 漢陽趙公 武彬之墓(한양조공 무빈지묘)
1886.7.20일 생 1952.10.4일 졸
배 김해 덕사 생 2남 2녀 / 배 김해 봉옥 생 1남 2녀
공께선 훈학중인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일제타도 격문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이재수 난중일기를 발행 판매한 바 있으며 그후 일본에 건너가 통항조합을 만들고 대판지점을 개설 제주 일본간을 운항한 바 있음 / 전묘소 : 구분악
배 김해 덕사 생 2남 2녀 / 배 김해 봉옥 생 1남 2녀
공께선 훈학중인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일제타도 격문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이재수 난중일기를 발행 판매한 바 있으며 그후 일본에 건너가 통항조합을 만들고 대판지점을 개설 제주 일본간을 운항한 바 있음 / 전묘소 : 구분악
宜人金海德四之墓(의인 김해 덕사 지묘)
宜人金海逢玉之墓(의인 김해 봉옥 지묘)
宜人金海逢玉之墓(의인 김해 봉옥 지묘)
씨는 무빈의 배위임. 1884.1.17일 생, 1968.1.11일 졸, 생 2남 2녀
1자 경아(京守), 손 우홍 정화 헌삼 / 2자 鴛兒 손우정 우평 / 장녀 태아 壻(사위) 진주강씨 / 2녀 요아 壻 이국경 / 외손 이정자 문승언 / 전묘소 : 구분악쌍묘
1자 경아(京守), 손 우홍 정화 헌삼 / 2자 鴛兒 손우정 우평 / 장녀 태아 壻(사위) 진주강씨 / 2녀 요아 壻 이국경 / 외손 이정자 문승언 / 전묘소 : 구분악쌍묘
씨는 무빈의 배위임. 1896년생, 기 6.13. 생 1남 1녀
三子 昌和 / 三女 희아 壻 현창혁 외손 우철 / 전묘소 : 구분악
三子 昌和 / 三女 희아 壻 현창혁 외손 우철 / 전묘소 : 구분악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3800 한양조씨 남원공파 낙천문중묘원 애국지사 훈장 조무빈의 묘를 찾았다.
붉은 못의 유래
조수2리 설촌은 1810년경 전주이씨 일가가 현 저지리 수동옆 용선달리에 입주한 것이 설촌의 시작이며, 다시금 우리 고향 조수리 주지동에는 1864년도경 제주양씨가 입주하여 주민의 노력으로 산아래 우물을 찾아 물을 영구히 보존되고 식수로 이용할 만한 곳이 적정하다고 인정됨에 따라 속칭(오름허리) 정하여 복구하고 사용하던 바, 지금에 와서 각 성씨가 입주하게 되었고 연못토질이 황토와 송이가 섞여 붉게 보이므로 붉은 못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 주민은 물론이며 극심한 가뭄에는 이웃마을에서도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조수리 신성동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75년까지 식수로 사용하다 1975년 5월 10일자로 행정상의 조수리로 전해 내려온다.
조수2리 설촌은 1810년경 전주이씨 일가가 현 저지리 수동옆 용선달리에 입주한 것이 설촌의 시작이며, 다시금 우리 고향 조수리 주지동에는 1864년도경 제주양씨가 입주하여 주민의 노력으로 산아래 우물을 찾아 물을 영구히 보존되고 식수로 이용할 만한 곳이 적정하다고 인정됨에 따라 속칭(오름허리) 정하여 복구하고 사용하던 바, 지금에 와서 각 성씨가 입주하게 되었고 연못토질이 황토와 송이가 섞여 붉게 보이므로 붉은 못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 주민은 물론이며 극심한 가뭄에는 이웃마을에서도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조수리 신성동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975년까지 식수로 사용하다 1975년 5월 10일자로 행정상의 조수리로 전해 내려온다.
한양조씨 남원공파 낙천문중 묘원
(연원) 합동봉제단
우리 한양조씨의 시조는 휘 지수(之壽)이시다. 공은 중국 송나라 1대 황제 휘 조광윤(趙匡胤)의 8대손 익(翼)의 2자이며 1160년 고려 이종 14년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려조에서 험의중서사를 지내셨고 조선조가 개국하자 후손들이 한성으로 이거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정하였으며 개국 1등공신을 비롯 일문육절(一門六節)의 충신과 명신현유를 많이 배출하였음.
남원공파 입도중시조는 입도 1세 교수관 휘 방좌(邦佐)이시다. 공은 충무공 휘 영무(英茂)의 3자인 남원부 절제사 휘 전(琠)의 8세손이며 계유정난에 의한 일문육절의 비극과 기묘사화 등에 의한 멸문지화를 피하여 1520년경 휘 방보(邦輔)와 함께 제주에 낙향하였으며 입도당시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가 편찬한 근사록(近思錄)을 반입하여 유교철학의 전파를 비롯 많은 후학양성에 기여하였으며 후손들은 제주일원에 고루 분포하여 살아가고 있음.
조수파 1세는 입도 6세 휘 시운(時雲)조이시며 1670년경 휘 시용(時龍) 휘 시운(時雲) 형제가 조수에 입거 집성촌을 형성하여 많은 인재를 요로에 배출하는 한편 도문중회의 발전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낙천파 1세는 입도 10세 휘 종득(宗得)조이시고 1780년 초 낙천에 정착하였으며 방좌조계 최초 족보인 계유필보 서문을 쓰신 대문장가 휘 문빈(文彬)조를 비롯 항일 애국지사와 공직자 등 각계 각층 지역 지도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음.
유구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온 조상의 근원과 사적을 밝혀 알림은 선대의 유업과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제족의 화합과 친이를 돈독히 하기 위함임을 깊이 인식하는 한편 항상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흠모하여 왔으며 급변하는 세속의 변혁에 따라 존립의 영안을 더욱 공고히 보전하고자 각처에 산재해 있는 휘 종득(宗得)조 묘를 비롯 휘 영환(永煥) 휘 용하(用夏) 3대조고비묘를 제족의 지성을 모아 새로 마련한 이곳 영지에 유택을 마련하였아오며 여기에 뫼신 영령 제존위의 시제를 성심성의를 다하여 대대손손 봉향하고자 합동봉제단을 지었나이다. 이는 오상(五常)의 기본정신에 기인한 효심의 발로이오니 자손들의 무례하고 부족한 점 해량하시고 고히고히 영면하소서.
우리 한양조씨의 시조는 휘 지수(之壽)이시다. 공은 중국 송나라 1대 황제 휘 조광윤(趙匡胤)의 8대손 익(翼)의 2자이며 1160년 고려 이종 14년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려조에서 험의중서사를 지내셨고 조선조가 개국하자 후손들이 한성으로 이거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정하였으며 개국 1등공신을 비롯 일문육절(一門六節)의 충신과 명신현유를 많이 배출하였음.
남원공파 입도중시조는 입도 1세 교수관 휘 방좌(邦佐)이시다. 공은 충무공 휘 영무(英茂)의 3자인 남원부 절제사 휘 전(琠)의 8세손이며 계유정난에 의한 일문육절의 비극과 기묘사화 등에 의한 멸문지화를 피하여 1520년경 휘 방보(邦輔)와 함께 제주에 낙향하였으며 입도당시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가 편찬한 근사록(近思錄)을 반입하여 유교철학의 전파를 비롯 많은 후학양성에 기여하였으며 후손들은 제주일원에 고루 분포하여 살아가고 있음.
조수파 1세는 입도 6세 휘 시운(時雲)조이시며 1670년경 휘 시용(時龍) 휘 시운(時雲) 형제가 조수에 입거 집성촌을 형성하여 많은 인재를 요로에 배출하는 한편 도문중회의 발전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낙천파 1세는 입도 10세 휘 종득(宗得)조이시고 1780년 초 낙천에 정착하였으며 방좌조계 최초 족보인 계유필보 서문을 쓰신 대문장가 휘 문빈(文彬)조를 비롯 항일 애국지사와 공직자 등 각계 각층 지역 지도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음.
유구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온 조상의 근원과 사적을 밝혀 알림은 선대의 유업과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제족의 화합과 친이를 돈독히 하기 위함임을 깊이 인식하는 한편 항상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흠모하여 왔으며 급변하는 세속의 변혁에 따라 존립의 영안을 더욱 공고히 보전하고자 각처에 산재해 있는 휘 종득(宗得)조 묘를 비롯 휘 영환(永煥) 휘 용하(用夏) 3대조고비묘를 제족의 지성을 모아 새로 마련한 이곳 영지에 유택을 마련하였아오며 여기에 뫼신 영령 제존위의 시제를 성심성의를 다하여 대대손손 봉향하고자 합동봉제단을 지었나이다. 이는 오상(五常)의 기본정신에 기인한 효심의 발로이오니 자손들의 무례하고 부족한 점 해량하시고 고히고히 영면하소서.
입도 10세 종득조 직계 존비속 세계표
구묘비가 보관되어 있었다. 留鄕別監趙公武彬, 孺人金海金씨 之墓(유향별감조공 무빈, 유인 김해김씨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