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성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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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산9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黃鷄岡(황계강) 累塚中(누총중)에 三尺孤墳(삼척고분)이 有(유)하니 以(이)가 金海(김해) 金時成(김시성) 夕淵君(석연군)의 藏(장)이라. 芳年(방년) 二十五歲(25세)되던 癸酉(계유) 九月(9월) 二十八日(28일)에 卒(졸)하고 翌月(익월) 一日(1일)에 여기 葬(장)하니 故(고) 月舫雅士(월방아사) 昌鎬公(창호공)의 次子(차자)라. 己酉(기유) 二月(2월) 十六日(16일) 濟州(제주) 朝天(조천)에 生(생)하야 七日(7일)에 父(부)을 失(실)하고 또 四歲(4세)엔 母(모)가 去(거)함으로 祖母(조모) 宋氏(송씨)와 仲父(중부) 仁鎬(인호)에 의하여 撫育(무육)되다. 天資(천자)가 端雅明敏(단아명민)하야 幼詩(유시)부터 學藝(학예)에 優越(우월)하므로 人(인)이 奇才(기재)라. 稱(칭)하더라. 자라 光州高普(광주고보)에 遊學(유학)할세 諸生(제생)이 모다 敬服(경복)하더니 第(제) 四學年(4학년) 夏明(하명) 滿洲旅行(만주여행)을 作(작)하고 歸程即時(귀정즉시) 盟休(맹휴)가 勃起(발기)하니 이것이 朝鮮學生運動(조선학생운동)의 發源(발원)이라. 君(군)이 首謨(수모)로 退學(퇴학)을 當(당)하고 翌年(익년)에 醒進會事件(성진회사건)이 또 起(기)하야 連坐(연좌)로 二年(2년)을 服役(복역)하고 出獄(출옥) 歸鄕(귀향) 後(후) 其兄(기형) 時均軍(시균군)의 大阪(대판)에서 卒(졸) 함에 軍(군)이 返葬(반장)한 後(후) 二年(2년)만에 自己(자기) 赤(적) 最後(최후)를 마쳤다.
嗚呼(오호)라 天(천)이여! 基才(기재)를 與(여)하고 基命(기명)을 不與(불여)함이 어찌 哀惜(애석)치 아니한가! 오직 岡上(강상)의 靑松(청송)이 君(군)의 儀表(의표)를 象徵(상징)할 뿐이다.
檀紀(단기) 四二六九年(4269년) 丙子(병자) 孟夏(맹하) 仲父(중부) 仁鎬(인호) 敍(서) 高順欽(고순흠) 校書(교서)
西紀(서기) 二千八年(2008년) 十月(10월) 日(일) 濟州特別自治道知事(제주특별자치도지사) 謹竪(근수)
고 김시숙의 묘 뒷편에 보이는 애국지사 김시성의 묘
愛國志士 金時成 之墓(애국지사 김시성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