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식 묘

4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산9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열사의 아호는 송산 자는 경덕 휘는 명식이시다. 김해김씨 시조 수로왕의 후예이신 삼현파 입도시조 복모공의 16세손으로 조는 해미현감을 지내신 휘 응전이시며 고는 정의현감을 지내신 휘 문주이시고 비는 숙부인 여산송씨이시다. 열사는 1891년 9월 26일 조천에서 김씨명문의 4남으로 태어나시어 향리 의흥학숙을 거쳐서 한성고보를 나오시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총명다재하셨던 열사는 학창시
절에는 신익희 백남훈 장덕수 등과 더불어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셨고 뒤에 회장으로 피선되어서는 학회지 학지광을 발간하셨으며 1919년 3.1운동에 앞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2.8독립선언에도 참가하시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셨으며 1922년에는 신생활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하셨는데 이때 필화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시다가 병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나시었다. 열사는 이밖에 조선청년회연맹합회 노동공제회 신간회 등에도 참여 활동하셨으며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진력하시다가 일경에 피검되어 반신불수가 되도록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 다시 대판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루셨다. 석방되신 후에도 열사는 고문후유증으로 앓으시다가 1943년 2월 11일 세화리에서 그렇게도 원하시던 조국광복도 못본채 향년 52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셨다. 열사는 슬하에 갑환 성환 순혜 수원 순실를 두셨으며 자부 ··· 중략 ··· 열사의 일생은 일찍이 고순흠 동후표와 더불어 조국 광복을 위
하여 몸바칠 것을 맹서하고 송죽매의 결의를 다지신 바와 같이 오직 독립운동으로 일관한 생애였으니 1999년 8월 15일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열사가 생전에 이룩하신 고결한 애국애정과 위해단 업적은 영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홍순만 근찬 문기선 근대자 서
서기 2001년 9월 일 북제주군수 건립
오른쪽 나무가 김시숙 선생의 묘가 있던 곳이다. 반대쪽에는 순국선열 김명식의 묘가 있었다.
殉國烈士 金公 明植 之墓(순국선열 김공 명식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