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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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114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三一獨立運動紀念塔(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취지문
기미년 제주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폭정에 분연히 항거한 3.1운동의 확산기류로, 동년 3월 21일 이곳 조천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최초로 결행되었다. 김시범·김시은·이문천·김연배·박두규·김희수·황진식·김필원·김장환·김용찬·김경희·백응선·고재륜·김형배 님등 열혈청년들이 주도하고, 수백 수천의 도민들이 한마음으로 결집된 이 운동은 전도민에게 뜨거운 민족정기를 일깨운 일대 쾌거였다. 그러나 열사들이 왜경에게 잡혀 옥고를 치른 후, 그 거룩한 뜻을 이어받고자 노력해 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은 기념비만이 그 날의 함성과 넋을 기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열사들의 고장이며 제주 만세운동의 요람인 이 동산에 민족을 위해 몸을 불사른 그 숭고한 정신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고자 도민의 성력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서기 1991년 3월 1일 조천 만세동산 성역화 추진위원회
열네 분 하나 되어 겨레의 혼 부를 때
뉘 저 바다 잠재우고 저 하늘 가릴 수 있었으랴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온 누리에 차고 넘쳤거니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판결

김시희(金侍熙) 당 27세 김백능(金百能) 당 22세
부병각(夫秉恪) 당 22세 김종호(金宗鎬) 당 18세
한철영(韓哲瑛) 당 23세 한석화(韓錫化) 당 23세
김동인(金東仁) 당 21세 김순탁(金淳鐸) 당 25세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에 처함
한백흥(韓佰興) 당 21세 징역 4월에 집행유에 3년에 처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형을 받으신 분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1부 판결

김시범(金時範) 당 30세 김시은(金時殷) 당 30세 각각 징역 1년
황진식(黃鎭式) 당 20세 김장환(金章煥) 당 18세 김필원(金弼遠) 당 20세 김희수(金熙洙) 당 21세 이문천(李文千) 당 28세 김연배(金年培) 당 24세 박두규(朴斗圭) 당 23세 각각 징역 8월
김용찬(金容燦) 당 31세 고재륜(高載崙) 당 21세 김형배(金瑩培) 당 19세 김경희(金慶熙) 당 26세 백응선(百膺善) 당 24세 각 징역 6월에 처하여 각각 복역 하였음
김봉각 선생 공덕비
기미년(1919) 제주도 만세운동의 함성이 멎은지 70여 성상이 흘렀다. 후손들이 그날의 민족정기를 올곧게 이어받고자 안타까워 하던중, 뒤늦게나마 북제주군과 조천읍민은 그 거룩한 넋을 기리고자 이곳 만세동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는 재일 김봉각님이 거금을 쾌척 동참하였다. 님은 1921년 3월 4일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신흥리 133번지에서 조부 김해김공 해원(동서마을을 합하여 신흥리라 리명을 짓고 초대 이장이 되다) 조모 권갑순 부 광수 모 이해생의 장남으로 출행하였다. 9세의 어린 나이로 도일후 갖은 험로를 극복하고 18세에 안성옥 여사와 결혼,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약관에는 계김동지회(김봉각, 강금종, 한만숙, 김병목, 고봉조, 부두전)를 결성,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활동하다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항상 조국에 대한 불타는 정열을 간직하고, 또한 사업자로서의 성문도 높인 분이다. 이제 이곳 만세동산의 성역화 사업에 즈음하여 님의 높은 뜻을 기려 추진위원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