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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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일동 1089-2
탐방로그
제주시 외도1동 1126-2 김해 김씨 문중묘지 외부문중 묘원 입구 옆에는 애국지사 김상언 독립항쟁기가 위치해 있다. 김상언 지사의 독립운동 내역을 기록한 안내판으로, 묘원 입구 옆에 세워져 있으며 묘소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묘원 안으로 들어와 갓머리가 있는 비석을 찾아가면 묘소에 도착한다. 묘소의 주소는 제주시 외도일동 1089-2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國家有功者 金商彦 孺人 延州玄氏 卯吉 之墓(국가유공자 김상언 유인 연주현씨 묘길 지묘)
공은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의 68세손이요. 제주 입도조인 전 좌정승 휘 만희의 16세손이시다.
고조 통정대부 휘 용택 증조 가선대부 휘 항 삼조 통정대부 휘 득관이시다.
공은 1873년 계유에 고 통정대부 휘 용진 비 숙부인 청주한씨의 1남으
로 출생하셨다. 공은 장성하여 연주현씨 묘길을 배우로 맞아 2남 2녀를 낳으시니 자는 춘화 봉화요 자부는 선정춘 김정생이라. 녀는 정화 신화 강도선 이시춘이라. 손은 철 군철 성철 만철 덕철이요. 손부는 장응순 장순자 김춘옥 이옥희라. 손녀는 부숙 종숙 수숙 풍자 명자 옥자요. 손서는 신임순 김기상 고진희 고은종 신태현 이정갑이라. 증손은 대준 대건 태역 태화 태문 태훈 태준이요. 증손녀는 희낭 윤정 정미 유미 미숙이요. 현손은 민범이라. 공의 국가유공사항은 일제하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6년간의 징역형을 치른 국가독립유공자로 1996년 6월 1일에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셨다.
공은 1965년 8월 24일 향년 93세로 별세하시고 묘는 제주시 외도
동 남대거 지동전 서향으로 모셨다가 1994년 제주시 외도1동 1089번지로 이묘하다. 배 연주현씨 묘길은 1878년 7월 7일생으로 1966년 2월 28일 향년 88세로 별세하셨으며 묘는 공묘와 동일 장소에 쌍묘로 모셨다.
서기 2002년 4월 5일 청명 자손 일동 근수
애국지사 김상언(金商彦) 독립항쟁기
김상언 지사는 제주시 외도동 1873년 2월 16일 부 김용진(金龍辰) 모 한씨(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해에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法井寺) 주지 스님 김연일(金蓮日)은 당시 신도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는데 스님이셨던 지사도 1918년 9월 19일 항쟁 계획에 가담하여 시위일을 10월 5일로 정하여 김연일 스님을 불무황제, 선도교 교주 박주석(朴周錫)을 도대장, 그 외 31인에게 군부서직을 부여하고 지사께서도 행동대장을 담당하여 각 이장에게 격문을 보내어 거사일에 의병을 모으도록 하여 400여명의 의병을 모아 10월 5일 전선을 절단하고 중문주재소를 습격, 파괴, 소각하는 동시에 주재소원과 길가는 일본인을 포박 구타하면서 2일간 항쟁을 벌이다 무장 왜병에 의해 피체되어 목포로 66인이 압송되고,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 중 3년이 감형되어 3년간 옥살이 하다 귀향하여 마을 청년들에게 애국사상 및 불교교리를 가르치시며 생활하시다 1965년 8월 24일 타계하시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묘소위치 : 200m 지점(화살표 표시) 1996년 12월 24일 제주시장
김해김씨 삼현공파 부윤근한 외도문중묘원
묘멱 안에 많은 묘소들이 있지만 찾을 수 없다. 저 멀리 돌담 밖에 갓머리 비석이 보인다.
愛國志士 金公 商彦 之墓 志士 夫人 延州玄氏 祔左(애국지사 김공 상언 지묘 지사 부인 연주현씨 부좌)
공은 1873년 2월 당시 제주읍 외도리 현 제주시 외도동에서 부 김용진 모 한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중 문면 하원리로 거처를 옮긴 공은 도순리 소재 법정사의 승려로 있으면서 늘 일제의 침탈에 분노하고 있었다. 1918년 무오 10월 5일 공을 비롯한 33인의 애국선열들은 법정사의 주지스님
김연일을 불무황제로 삼고 선도교 교주 박명수를 도대장으로 삼아 400여명의 봉기군을 군직체제로 편성하여 일본경찰의 연락망을 차단하고자 전선을 절단하고 중문경찰관 주재소를 점거하여 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는 한편 그곳에 구금되었던 주민 13명을 구했다. 봉기군은 평소 수탈이 심했던 일본인 관리와 상인들도 처단하고 서귀포 경찰서로 향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목포에서 지원군을 급파하여 봉기군을 무력 진압하였다. 공도 그때 체포되었고 1919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 복역 후 공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시다 1965년 8월 24일 별세하시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니 공의 애국애정은 영세에 무궁히 빛내리, 이에 애국지사님의 명복을 빌며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