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복 기념비

4

주소
경기도 시흥시 죽율동 597
탐방로그
시흥시 죽율동 765 생금어린이공원 내에 위치한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를 찾았다. 1919년 4월 4일, 당시 23세 청년이었던 김천복 선생은 죽률리 주민 수십 명을 모아 당시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현 군자초등학교 파출소 주변] 앞에서 펼쳐졌던 '군자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맞서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자면 원곡리 출신의 강은식 지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생금집(生金宅)
생금집은 금녕 김씨 자손이 12대 동안 세거하였던 곳으로 시흥시 지역 전통가옥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의 면적은 140.57㎡로 안채 열두 칸, 바깥채 여덟 칸, 헛간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있던 가옥은 1913년에 개축한 것으로 이후에도 부분적인 개수는 있었으나 20세기 초반 경기도 지역 가옥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부분적인 꾸밈새에 생활의 편의를 위한 고인이 잘 드러나 있었다. 이 가옥은 용마루가 'ㄱ'자로 꺾여있으며 팔작지붕을 올렸는데, 일반적인 'ㅡ'자 집보다 규모가 큰 'ㄱ'자 형태으 구조는 자영농 이상의 부농 게층의 집에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난방과 통풍을 동시에 고려한 '튼ㅁ'자 형태(「」)의 전형적인 중부 지방 가옥이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이 있고 부엌은 안방에 이어져 있다. 이 집은 분수에 맞는 생활 자세를 전해주는 생금 닭 전설의 현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전통가옥의 원형과 함께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어우려져 있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2005년 원형에 근거하여 보수.복원하였으며, 2014년 주변의 도시개발로 공동주택이 들어섬에 따라 어린이공원 내부에 자리잡게 되었다.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
김천복(金千福, 1897.2.13 ~ ?, 당시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 623-2 출신) 지사는 1919년 4월 4일, 죽률리 주민 수십명을 모아 당시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현 군자초등학교 파출소 주변] 앞에서 펼쳐졌던 '군자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맞서 수백명의 시위대를 이끌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23세의 청년이었던 김천복 지사는 군자면 원곡리 출신의 강은식 지사와 함께 체포되었고, 같은 해 6월에 형이 확정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2008년, 정부로부터 조국 독립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
2018년 7월 17일
시흥시장 임병택
시흥시 죽율동 765 생금어린이공원 내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를 찾았다.
생금어린이공원 - 위치 : 시흥시 죽율동 597 / 조성년도 : 2014년 7월 / 면적 : 7,364㎡
생금집에 얽힌 전설
조선조 말엽, 죽율동에 살던 김창관(金昌寬, 1845~1929, 호적에는 김창권으로 기록됨)이라는 노인이 옥구도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우물(생금우물)에서 쉬고 있었는데, 반짝거리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샛노란 털을 가진 닭이 한 마리 있었다. 보자기에 닭을 곱게 싸서 집으로 돌아와 골방 반닫이에 숨겨 두었는데, 이 때 보자기에 닭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 닭털 같지 않아 한양의 금방에 가서 물으니 금붙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횡재를 한 후에도 변함없이 근검절약하면서 며칠에 한번씩 금빛 닭털을 돈으로 바꾸어 살림과 땅을 마련하고 집도 새로 지었다. 노인이 황금 닭을 얻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게 되고, 새로 지은 노인의 집은 '생금댁'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노인은 마을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몇 년 후 시집간 딸이 다니러 왔다가 살림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보고 놀랐는데, 어머니로부터 그 간의 사정을 듣고 더욱 놀라게 되었다. 딸은 욕심이 나서 골방에 들어가 황금 닭을 치마폭에 싸가지고 몰래 시댁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주막에서 확인하려고 보니 번쩍이던 황금 닭은 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황금 닭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딸은 친정으로 돌아가 용서를 빌었으나, 돌덩어리는 다시 황금 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노인은 오히려 잘못을 뉘우친 딸을 칭찬하며, 얼마간의 재산을 나눠 주었다. 그 뒤로 노인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욕심내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전해지게 되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생금집'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