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1134-1
- 탐방로그
-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1134-1에 위치한 위국절사 영현비를 찾았다. 위국절사 영현비에 애국지사 명각 강문일, 박영순(朴榮淳), 배두봉(배창아) 선생이 추가로 명각되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獻誠金 芳名(헌성금 방명)
위령단을 세우는 글
위령단을 세우는 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다하였다면 이는 애국자로서 그 정신과 위업을 길이 보전하고 계승시켜나가는 것은 우리모두의 사명이다.
외세의 침략과 전란, 재난과 사변에 고귀한 목숨을 잃었거나 모진 형옥의 고초를 겪고 무고한 죽음을 당하였던 영혼들이 지역마다 없지 않겠으나 우리 마을 하귀리는 유독 그 수가 많았음에도 이를 기려 추모하거나 위령의 빗돌 한 점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만시지탄이 있어 일제강점으로 국권을 빼앗겼을 때 야학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만세을 외치다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모진 고문과 형옥을 치르셨던 선열들의 넋과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국방전선과 해외 전장에서 산화한 전몰호국영령을 추모하고 4.3에 무고히 희생된 채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의 명복을 빌고자 향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영역을 조성하여 영현비, 충의비, 위령비를 세운다.
이 영력은 선인들이 남긴 숭고한 충절의 정신을 기리며, 후세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다하였다면 이는 애국자로서 그 정신과 위업을 길이 보전하고 계승시켜나가는 것은 우리모두의 사명이다.
외세의 침략과 전란, 재난과 사변에 고귀한 목숨을 잃었거나 모진 형옥의 고초를 겪고 무고한 죽음을 당하였던 영혼들이 지역마다 없지 않겠으나 우리 마을 하귀리는 유독 그 수가 많았음에도 이를 기려 추모하거나 위령의 빗돌 한 점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만시지탄이 있어 일제강점으로 국권을 빼앗겼을 때 야학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만세을 외치다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모진 고문과 형옥을 치르셨던 선열들의 넋과 세계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국방전선과 해외 전장에서 산화한 전몰호국영령을 추모하고 4.3에 무고히 희생된 채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의 명복을 빌고자 향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영역을 조성하여 영현비, 충의비, 위령비를 세운다.
이 영력은 선인들이 남긴 숭고한 충절의 정신을 기리며, 후세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한다.
헌성비
경포전기주식회사 대표이사 김용현
경포전기주식회사 대표이사 김용현
慰靈檀(위령단)
慰靈檀(위령단)
爲國節士 英顯碑(위국절사 영현비)
爲國節士 英顯碑(위국절사 영현비)
지난날 우리국토가 제국주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에도 지표면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처럼 뜨거운 민족혼에 바탕한 크고 작은 저항운동은 삼천리 강산 어느 곳에서도 그친 바가 없었다. 남녘의 섬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진취적인 기상으로 도내에서 손꼽히던 하귀의 청년들이 그 뒷줄에 설 리는 만무했다. 당시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배두봉 선생등 하귀의 피끓는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휘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우선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야학을 개설하였다. 하귀1,2구 두 곳에 각각 야학 소를 운영하였으며 애국심과 신학문에의 동경을 안고 모여든 학생이 근 백여명에 달했으니 그 열기는 충분히 짐각할 수 있다 하겠다. 그 정열은 결국 만세운동으로 번졌으니 1935년 봄(5월5일) 야학생 80여명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관전동에서 미수샘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왜경에 강제 진압을 당하고 20여명이 외도주재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위 제분외에 강경생, 강창선, 김을봉,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선생등 10여명이 제주경찰서에 이송되었고 이어서 목포지청에까지 끌려가면서 선각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즈 중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세분은 목포에서의 1심재판과 대구에서는 2심 재판을 거치면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억과 기록이 뚜렸하고 분명하건만 해방이후 파란 많은 정국으로 말미암아 이제야 작은 빗돌 하나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으랴. 열사들의 후손된 우리들 모두 새삼 옷깃을 여미며 이 자리에 섰으니 피끓는 그 분들의 목소리가 지금인 듯 들려 오지 않는가. 그 날의 교훈이 이토록 생생하니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이 작은 빗돌이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의 끝이 아니라 작은 시작임을 다짐해야만 하리라.
그 과정에서 위 제분외에 강경생, 강창선, 김을봉,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선생등 10여명이 제주경찰서에 이송되었고 이어서 목포지청에까지 끌려가면서 선각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즈 중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세분은 목포에서의 1심재판과 대구에서는 2심 재판을 거치면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억과 기록이 뚜렸하고 분명하건만 해방이후 파란 많은 정국으로 말미암아 이제야 작은 빗돌 하나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으랴. 열사들의 후손된 우리들 모두 새삼 옷깃을 여미며 이 자리에 섰으니 피끓는 그 분들의 목소리가 지금인 듯 들려 오지 않는가. 그 날의 교훈이 이토록 생생하니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이 작은 빗돌이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의 끝이 아니라 작은 시작임을 다짐해야만 하리라.
강문일 건국포장(1995.8.15)
박영순 건국포장(1995.8.15)
김홍규
배두봉
건국포장(2019.8.15)
김을봉
강경생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강창선
장규현
김용범
강상언
김예태
강상무
강창손
오성선
고순옥
박신숙
고효생
고공숙
배재출 외 80여명
박영순 건국포장(1995.8.15)
김홍규
배두봉
건국포장(2019.8.15)
김을봉
강경생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강창선
장규현
김용범
강상언
김예태
강상무
강창손
오성선
고순옥
박신숙
고효생
고공숙
배재출 외 80여명
護國英靈 忠義碑(호국영령 충의비)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1134-1 사거리 영모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