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502-1 (산121-7)
- 탐방로그
- 시흥시 조남동 502-1(조남동 산 121-7)에 위치한 조병세 선생의 옛 묘터를 찾아왔다. 조병세 선생의 묘는 최근에 후손들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으며, 현장에는 선생의 사적비와 와비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1990년 12월 1일에 선생의 사적비(事蹟碑)와 와비(臥傳)가 세워졌는데, 사적비는 묘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이 짓고,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다. 묘 왼쪽에는 와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와비는 선생이 남긴 유소(遺疏), 국민에게 고하는 유촉(告國民遺囑),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致各國公使)이다.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다음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기 전 남긴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의 내용이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 못하게 되니, 분심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 못하게 되니, 분심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경기 시흥시 조남동 산 121-7에 있는 조병세 선생의 옛 묘터를 찾아왔다.
이곳의 주소는 시흥시 조남동 502-1이다.
이곳의 주소는 시흥시 조남동 502-1이다.
최근에 후손들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있었다. 현장에는 선생의 사적비와 와비가 그대로 있다.
조병세(趙秉世) 선생 묘
지정번호: 시흥시 향토유적 제5호/ 지정일자 : 1986.3.3 / 소재지: 시흥시 조남동 산121-7 / 시대: 묘 - 광무 9년(1905), 사적비·와비 - 1990.12.1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이다. 1859년(철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中樞院) 좌의장(左議長)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묘는 마하산 동쪽에 있는데, 선생의 묘는 위에서 세번째이다. 묘 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1990년 12월 1일에 선생의 사적비(事蹟碑)와 와비(臥傳)가 세워졌는데, 사적비는 묘의 오른쪽에, 와비는 왼쪽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이 짓고,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으며, 와비는 선생이 남긴 유소(遺疏)와 국민에게 고하는 유촉[告國民遺囑],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致各國公使]로 이루어져 있다.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다음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의 내용이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 못하게 되니, 분심(憤心)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 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정번호: 시흥시 향토유적 제5호/ 지정일자 : 1986.3.3 / 소재지: 시흥시 조남동 산121-7 / 시대: 묘 - 광무 9년(1905), 사적비·와비 - 1990.12.1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이다. 1859년(철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中樞院) 좌의장(左議長)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묘는 마하산 동쪽에 있는데, 선생의 묘는 위에서 세번째이다. 묘 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1990년 12월 1일에 선생의 사적비(事蹟碑)와 와비(臥傳)가 세워졌는데, 사적비는 묘의 오른쪽에, 와비는 왼쪽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이 짓고,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으며, 와비는 선생이 남긴 유소(遺疏)와 국민에게 고하는 유촉[告國民遺囑],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致各國公使]로 이루어져 있다.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다음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의 내용이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 못하게 되니, 분심(憤心)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 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국지사 충정공 조병세 선조께서는 1827년 6월 2일 태어나셔서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하시어 여기에 잠드셨다가, 후손들에 의해 2011년 5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에 이장/봉안 되시었다.
2011년 5월 12일 충정공 5세손 조범식
2011년 5월 12일 충정공 5세손 조범식
山齋 先生 忠正 趙公 事蹟 士碑(산재 선생 충정 조공 사적 사비)
충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령 경연사감 춘추관사 시강원 부증시 충정대훈 위조공 사적비
대한 광무 9년 을사 동 11월 초 5일 갑술에 원주 의정부 좌의정 산재 선생 충정 조공 병세사지하다. 이에 앞서 고종 초원으로부터 서세동점하여 내우와 외홍이 날로 극함에 병자에 일본과의 수호를 비롯하여 구미 열강과 통상의 길이 차제로 열리니 이는 당시의 대세이라.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형국이어니와 이를 능히 감당함에는 오직 국가의 재산과 민족의 각성만이 좌우할 수 있고 진일보하여 개물성무하는 대업을 이룩함에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지사의 ○실단우 끊임이 없었으나 실효를 못 거두고 마침내 동양의 평화를 표방하는 일본은 청아와의 대결전을 치르면서 사시○○하여 위력을 가함에 드디어 국정의 개혁을 감행하고 모후의 시해로 그 악을 극하니 한결같이 배신망의와 절병주기로 일관하는 나머지 이해 10월에 보호를 내세우며 거병 범궐하여 5조를 협약함에 주무오적이 단단하여 서가하다. 때에 공은 가평 향제에 퇴휴하던 즈음 변보를 듣고 급거 예경하여 단독 입대와 백관 연차로 항론을 누진함에 문출의 명을 묻고 이내 궐외에 석고하다 일헌에 구집되니 공의 뒤를 이어 민충정공 영환이 소수로 항쟁하다 자문하고 그 익일에 공도 유소와 국민 및 각국 공사에 유서를 남기고 표동원 소청에서 승교 귀가하던 중 탄약 순국하니 향수 79이다. 공의 자는 치현이요 호는 산재이니 양주조씨 고려 판 중추원사령을 시조로 하고 재전하여 서운관 정의는 강복자정하고 이우당 태채는 우의정 익 충익이니 경종 신축 4대신의 1이요. ○생 회헌 관빈은 보국 판 중추부사 익 문간이니 공의 5세조이다. 증조 명철은 공조참의 증 이조판서요. 조 진영은 진사 증 좌찬성이오. 고 유순은 홍주현감 증 영의정이오. 비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는 봉사 직수의 녀이다. 순조 정해 6월 초 2일에 한○ 회동에서 생하니 철종 임자에 진사 무오에 건릉참봉으로 무사하고 기미에 증 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승육하여 문겸 선전관에 제수되고 사간원의 정언 헙납과 병조의 좌랑 정랑과 홍문관교리 및 어영위의 종사로 辟하고 고종 신미에 통정에 진계하여 정축에 가선 을유
대한 광무 9년 을사 동 11월 초 5일 갑술에 원주 의정부 좌의정 산재 선생 충정 조공 병세사지하다. 이에 앞서 고종 초원으로부터 서세동점하여 내우와 외홍이 날로 극함에 병자에 일본과의 수호를 비롯하여 구미 열강과 통상의 길이 차제로 열리니 이는 당시의 대세이라.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형국이어니와 이를 능히 감당함에는 오직 국가의 재산과 민족의 각성만이 좌우할 수 있고 진일보하여 개물성무하는 대업을 이룩함에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지사의 ○실단우 끊임이 없었으나 실효를 못 거두고 마침내 동양의 평화를 표방하는 일본은 청아와의 대결전을 치르면서 사시○○하여 위력을 가함에 드디어 국정의 개혁을 감행하고 모후의 시해로 그 악을 극하니 한결같이 배신망의와 절병주기로 일관하는 나머지 이해 10월에 보호를 내세우며 거병 범궐하여 5조를 협약함에 주무오적이 단단하여 서가하다. 때에 공은 가평 향제에 퇴휴하던 즈음 변보를 듣고 급거 예경하여 단독 입대와 백관 연차로 항론을 누진함에 문출의 명을 묻고 이내 궐외에 석고하다 일헌에 구집되니 공의 뒤를 이어 민충정공 영환이 소수로 항쟁하다 자문하고 그 익일에 공도 유소와 국민 및 각국 공사에 유서를 남기고 표동원 소청에서 승교 귀가하던 중 탄약 순국하니 향수 79이다. 공의 자는 치현이요 호는 산재이니 양주조씨 고려 판 중추원사령을 시조로 하고 재전하여 서운관 정의는 강복자정하고 이우당 태채는 우의정 익 충익이니 경종 신축 4대신의 1이요. ○생 회헌 관빈은 보국 판 중추부사 익 문간이니 공의 5세조이다. 증조 명철은 공조참의 증 이조판서요. 조 진영은 진사 증 좌찬성이오. 고 유순은 홍주현감 증 영의정이오. 비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는 봉사 직수의 녀이다. 순조 정해 6월 초 2일에 한○ 회동에서 생하니 철종 임자에 진사 무오에 건릉참봉으로 무사하고 기미에 증 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승육하여 문겸 선전관에 제수되고 사간원의 정언 헙납과 병조의 좌랑 정랑과 홍문관교리 및 어영위의 종사로 辟하고 고종 신미에 통정에 진계하여 정축에 가선 을유
에 가의 정해에 자헌으로 기축에 대배하니 천역은 승정원의 좌부 좌우도승지와 육조로는 이조참의 참판 판서와 호조참판 예조참판 판서 병조참판 판서 병조참지 형조참의 공조참판 판서요. 대사헌 부총관 성균관 대사성 동지사 경연춘추 의금 돈녕부 동지지사와 중추부 판사 한성부 우좌 판윤과 총리 기무 부사 의정부 좌참찬 우 의정 좌의정 시강원 전에 이르고 함경도 어사 의주부윤 사은부사 동지 정사 및 정부 유사당상이요. 종조 사옹 상의원 제조 종조 경모 관내의군자봉 상사복 총위영 존호도감 묘○도감 도제조 대전 ○전 옥보서사관 선묘 숙묘 전보서사관 별운검이요. 경장 후에는 의정부 의정 관내부 특진관 교정청 총재 교전 ○총재 중추원 의장 돈녕원 판사 영사 총호사 상○ 도감 도제조요. 임인에 입○ 사사궤장하다. 공의 용모 청○하고 천품이 ○○충○하여 일찌기 장자의 기망이 컸으며 매양 정교의 득실과 세도의 한융에 있어 표안의 ○를 금하지 못하니 임진에 시무를 극론함에 휘언없어 전상○의 칭이 있고 내신에 19조를 수차하니 자립지방과 부강지책을 인○취사하여 시간을 홍제할 경륜을 상진하고 을사 2월에 시폐 5조를 답진함에 극자수물대인이 구급의 선무임을 ○간하여 복상의 점을 심계하고 미기에 10월의 변이 일어 대권 통감의 욕으로 국가 존망의 급기를 면하지 못하게 됨에 약장의 작환과 오적의 정형을 극간하고 병의판사로 수립이 탁연하여 일가충○이 천하를 경동케하니 계문에 대훈위 전척대수장을 특서하고 작설과 즉○를 입정 전 시행하여 ○국망가와 ○정○지로 충정이라 익하고 광복 후 임인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으로 포숭하다. 경기 안산 조남동 선영 정좌에 유명으로 보장하고 배 증 정경부인 광산김씨 부좌하니 자 태희는 진사 증 내부 협변이요. 손 중목은 경기 관찰사이다. 오호라. 예로부터 강개○사보다 ○용○의 어렵다 하였으니 이는 곧 공을 일음이라. 조단의 원로로 일세의 중망을 한몸에 지니어 공의 동정어묵은 만민 이목의 주적이 되니 공 1인의 성인은 그 미치는 바 천만인의 수명보다 더하다 할지라. 어찌 장렬하지 않으리오. 공의 위충고절은 스스로 길이 휘영할 것이라 구태어 무사를 기다림이 없을지나 공의 가세와 남다른 선의
어 이제 기적하는 비를 세움에 참안을 무릅쓰고 경앙하는 뜻을 펴게 되니 공 화로 함께 광영 아닐 수 없다.
후학 안동 김창현 경 찬, 후학 안동 김응현 서 병전
단기 4323년 세재 경오 4월 일 립
후학 안동 김창현 경 찬, 후학 안동 김응현 서 병전
단기 4323년 세재 경오 4월 일 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