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호 선교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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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이동 907-1
탐방로그
제주시 삼도이동 907-1 제주성내교회 내 애국지사 조봉호 선생 선교기념비문, 선교공적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제주시 삼도이동 907-1 제주성내교회 내 애국지사 조봉호 선생 선교기념비문, 선교공적비를 찾아왔다.
최초의 성내교회 터
제주도 개신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성내교회 터. 1908년 첫 선교사가 되어 도임한 이기품목사는 중인문안 초가에 임시기도소를 두었으나 1910년 이 자리에 있던 출신청 건물을 사들여 처음으로 성내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때부터 활발한 전도활동이 시작되었고 이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순국행장(殉國行狀)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제주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 교인들 간에는 독립회생회 제주지방 조직을 서둘도다.조봉호는 김창국, 최정식, 김창언, 문창래, 이도종, 김창규와 더불어 독립희생회 지방 조직에 착수하고자 임시정부헌장 선포문과 조선의 독립을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소식을 담은 해외 통신문을 입수하여 은밀리에 복사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서도다.특히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돕고자 독립군 군자금 헌납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도민 4450여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금 동년 7월 상해로 송금하도다.그러나 이 사실이 왜경에 탄로되어 동년 7월 20일 조봉호 등 관련자 60여명이 검속되자 조봉호는 스스로 모든 일을 책임지기로 결심 동지들을 구한 후 홀로 총 책임을 지고 왜경의 심판을 받도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12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의 언도를 받아 대구 형무소에 수감 복역하다가 서기 1920년 4월 28일 옥사하도다.


추념의 글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의 얼이 숨 쉴수 없는 민족의 슬픔 속에서 독립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순국한 지사들의 넋 앞에 우리 후손들은 고개 숙이리. 일본의 식민정치 아래서 굴욕적 생활을 건뎌야 했던 지사들은 후손에게 그 참상을 물려줄 수 없었기에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모아 보내었으리.
조봉호지사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며 동지들을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 받으리.요한 게시록 2장 10절의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는 성경말씀을 실천에 옮긴 조봉호지사의 뜻을 오래도록 간직하리.
지사의 숭고한 애국 애족과 희생정신앞에 도민의 이름으로 추념하노니 복된 앞날을 함께 축복하여이다.
서기 1977년 1월 11일


약력
조봉호는 서기 1884년 5월 12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에서 조만형의 장자로 태어나다. 일찌기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제주 성내교회 이기풍 목사와 더불어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서기 1912년에는 복제주군 애월읍 금성리에 교회를 설립 기독교 선교활동을 위해 진력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서기 1919년 7월 독립군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 복역중 서기 1920년 4월 28일 순국하였으니 당시 나이 38세이다. 정부에서는 조봉호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장을 추서하다.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1977년 제주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세워진 순교,순국지사 조봉호 조사의 기념비문을 그 분의 순교,순국 제75주년(1928-1995)을 맞아 당신이 친히 시무,봉사하던 이 제주성내교회 울안에 복제하여 건립함
1994.8.15 광복절. 완공 1995.4.28 부활절. 봉헌 제주성내교회
추념의 글.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의 얼이 숨 쉴수 없는 민족의 슬픔 속에서 독립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순국한 지사들의 넋 앞에 우리 후손들은 고개 숙이리. 일본의 식민정치 아래서 굴욕적 생활을 건뎌야 했던 지사들은 후손에게 그 참상을 물려줄 수 없었기에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모아 보내었으리.
조봉호지사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며 동지들을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 받으리.요한 게시록 2장 10절의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는 성경말씀을 실천에 옮긴 조봉호지사의 뜻을 오래도록 간직하리.
지사의 숭고한 애국 애족과 희생정신앞에 도민의 이름으로 추념하노니 복된 앞날을 함께 축복하여이다.
서기 1977년 1월 11일
약력
조봉호는 서기 1884년 5월 12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에서 조만형의 장자로 태어나다. 일찌기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제주 성내교회 이기풍 목사와 더불어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서기 1912년에는 복제주군 애월읍 금성리에 교회를 설립 기독교 선교활동을 위해 진력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서기 1919년 7월 독립군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 복역중 서기 1920년 4월 28일 순국하였으니 당시 나이 38세이다. 정부에서는 조봉호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장을 추서하다.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1977년 제주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세워진 순교,순국지사 조봉호 조사의 기념비문을 그 분의 순교,순국 제75주년(1928-1995)을 맞아 당신이 친히 시무,봉사하던 이 제주성내교회 울안에 복제하여 건립함
1994.8.15 광복절. 완공 1995.4.28 부활절. 봉헌 제주성내교회
이 선교 공적비는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아픔이 있기 이전 제주노회의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 기념비는 제주시 삼도2동 907늬 1 여기 이 땅이 제주지역 복음전파가 시작된 장소요 바로 모 교회의 터임을 확증해 주는 역사적 증거물이다.
본 교회의 설립 100주년을 내다보면서 작가 형제 한분의 손을 빌어 조봉호 전도사 순교, 순국기념문을 복제, 제주노회에 의한 본 교회 당회 조직 75주년 기념비 조각과 함께 이 선교 공적비를 종각이 있던 옛 자리에 조심스런 마음으로 옮겨 세운다.
1994년 여름 제주 성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