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벽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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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남문리 16-5
탐방로그
양양군 양양읍 남문리 16-5 일대에 위치한 양양 3.1 만세운동 조화벽거리 조형물, 벽화를 찾았다. 조화벽 거리는 양양 3.1만세 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의지를 담아 조성하였다. 조화벽 지사는 대표적인 3.1 만세 운동의 여성 항일운동가이며, 조화벽거리 조성은 도시재생 예비사업에 선정된 의 사업비로 진행한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홍기(1895~1919)

함홍기 열사는 손양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양양군의 3.1 만세 운동사는 물론 전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의로운 죽음으로 일제의 폭압에 온몸으로 항거한 열사이다.

1919년 4월 1일 양양군 각 면 책임자들이 임천리 이교완의 집에 모여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4월 3일 모의 사실이 양양군수에게 발각되어 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주모자 급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실행에 들어갔고, 장날이었던 1919년 4월 4일 만세운동 낌새를 사전에 알아차린 일경은 장터를 폐쇄하였다.

하지만 함홍기 열사는 아침부터 손양면 사람들을 추동해 주민들과 양양 장터로 향하는 행군대열을 선도하여 남대천 다리에 이르니 그곳에는 이미 일경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일경과 대치하다가 동운교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동운교 위아래로 분산하여 물을 건너 양양 장터에 들어가 각 면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군중을 인솔하여 결찰서로 달려간다.

함홍기 열사는 경찰서장실로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전난 임천리에서 잡혀온 2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요구가 거절당하자 경찰서장을 꾸짖으며 화로를 집어 던지려고 하며 거세게 항의하다 일본 순사의 칼에 양팔이 잘리고 목에 칼을 맞아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대한민국 3.1 만세 운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조화벽(1895~1975)

조화벽 지사는 양양군 내의 김리교회에 많은 청년들과 활발히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다.

1919년 당시, 조화벽은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이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 일원으로 개성의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직접 필사한 3.1독립선언서를 버선 속 솜 사이에 돌돌 말아 숨겨서 고향인 양양으로 가져왔다.

묵솜을 걸고 가져온 독립선언서는 김필선 등 지역 젊은 청년들에게 전달되고, 이들과 합심하여 4월 4일 3.1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조화벽 지사는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선생과 혼인하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6년 뒤 고향인 양양으로 다시 돌아와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정명학원은 일제탄압으로 1944년 폐교되기 전까지 약 20년 동안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화벽 지사는 춘천의 윤희순 의병장, 철원의 곽진근 지사와 함께 강원도 3대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양양이 낳은 근대 여성 선각자이다.
양양3.1만세운동의 의의
● 우수한 문화와 역사를 토대로 만세운동의 성지가 되어 군민의 자긍심은 양양의 발전과 화합에 토대가 되었다.
● 양양3.1만세운동은 각 면 단위와 각 마을 단위로 책임자를 정하여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전개하였다.
● 양양은 유림의 고장이었다. 양양의 유림들은 조선왕조의 치욕을 갚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설득보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 외부 세력의 영향이 아니라 각 마을 단위로 구장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 신문명의 학교와 종교가 한 축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현산학교와 양양보통학교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 조화벽은 감리교인으로 양양 여성의 힘과 의지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로 꼽히고 있으며, 근대 여성 선각자이다.
● 만세운동은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여 현산청년회, 신간회, 농민조합등을 결성하여 1923년 양양농민조합사건의 토대가 되었다.
● 7개면 82개 마을에서 15,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 만세운동은 현산학교, 양양보통하교 출신들이 남궁억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사상과 양양인의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 신분, 종교, 나이, 직업,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 되어 단합된 양양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화벽거리' 안내판이 서 있는 것을 찾았다.
조화벽 거리
'조화벽 거리'는 양양3.1만세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의지를 담아 조성하였습니다.
조화벽 지사는 대표적인 3.1만세운동의 여성 항일 운동가입니다.
반대쪽 적산건물 방향으로 가 보았다.
양양 3.1만세운동 / 조화벽 거리
양양 3.1만세운동 / 조화벽 거리
'조화벽 거리'는 양양3.1만세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의지를 담아 조성하였습니다.
조화벽 지사는 대표적인 3.1만세운동의 여성 항일 운동가입니다.
양양군 양양읍 남문리 16-5 일대 양양3.1만세운동 조화벽거리 조형물, 벽화를 찾았다.
조화벽 거리
「조화벽 거리」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은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강원 영동지방에서는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4일부터 9일까지 7개면 82개 마을 15,000여 명의 주민이 시위에 가담하였는데 일본 군경들이 총칼로 제지를 하였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강력히 항거하다 12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43명이 상처를 입으면서 종결되었는데 양양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강렬하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조화벽 거리는 양양 3.1만세 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의지를 담아 조성하였다. 조화벽 지사는 대표적인 3.1 만세 운동의 여성 항일운동가이다. 본 거리 조성은 도시재생 예비사업에 선정된 의 사업비로 진행했다.

양양 3.1만세 운동 조화벽 거리
조화벽 거리
우리마을 지도 양양3.1만세운동
우리마을 지도 양양3.1만세운동

양양3.1만세운동은 싸전에서 모인 주민들이 떡장을 지나 양양초와 양양군의회를 거쳐 현산공원에서 집결했다.
충렬사 : 양양3.1만세운동 당시 순국하신 34위의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
양양교육도서관 : 전 현산학교(1906)-한서 남궁억(독립운동가) 설립, 전 양양보통학교(1910)
양양군의회 : 전 양양경찰서(일제시대), 함홍기, 권병연, 김학수 순국, 군 창고로 이용됐음
양양군청 : 전 관아
양양교회 : 관련인물 1) 조화벽지사-남편 유우석(유관순)오빠 2) 김영학목사
양양초등학교 : 현 위치로 양양보통학교 이전, 양양국민학교로 개칭(1951), 출신 독립운동가 : 함홍기, 김필선, 최인식
강원도에서 가장 강렬했던 양양3.1만세운동
조화벽(1895~1975)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여학생 조화벽"
"행동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조화벽 지사"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의 숨은 공로자"
양양3.1만세운동 순국열사
권병연, 함홍기, 김학구, 고대선, 김석희, 문종회,이학봉, 임병익, 전원거, 진원팔, 홍필삼, 황응상

양양3.1만세운동은 강원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항일운동이자 전국에서 손꼽히는 치열한 독립운동이었다.
만세운동 중에 12명의 열사를 비롯한 43명의 사상자가 났고 142명이나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