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호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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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387-4
탐방로그
제주도 제주시 건입동 397-4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있는 제주의병항쟁기념탑, 김만덕 할망 추모비, 김만덕의 묘를 찾았다.

모충사는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순국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운 사라봉 공원 내에 건립되었으며, 이 곳에는 의병항쟁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김만덕 할망기념탑이 서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추념의 글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의 얼이 숨쉴 수 없는 민족의 슬픔 속에서 독립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순국한 지사들의 넋 앞에 우리 후손들은 고개 숙이리. 일본의 식민 정치 아래서 굴욕적 생활을 견뎌야 했던 지사들은 후손에게 그 참상을 물려줄 수 없었기에 맨 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 자금을 모아 보내었으리. 조봉호 지사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니 동지들을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살모가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받으리.
요한 계시록 2장 10절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에 옮긴 조봉호 지사의 뜻을 오래도록 간직히라.
지사의 숭고한 애국 애족과 희생정신 앞에 도민의 이름으로 추념하노니 복된 앞날을 함께 축복하여이다.
서기 1977년 1월 11일
殉國行狀(순국행장)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제주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 교인들 간에는 독립회생회 제주지방 조직을 서둘도다. 조봉호(趙鳳鎬)는 김창국(金昶國), 최정식(崔靜埴), 김창언(金昶彦), 문창래(文昌來), 이도종(李道宗), 김창규(金昌圭)와 더불어 독립희생회 지방 조직에 착수하고자 임시정부헌장 선포문과 조선의 독립을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소식을 담은 해외 통신문을 입수하여 은밀리에 복사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서도다.특히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돕고자 독립군 군자금 헌납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도민 4450여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금 동년 7월 상해로 송금하도다. 그러나 이 사실이 왜경에 탄로되어 동년 7월 20일 조봉호 등 관련자 60여명이 검속되자 조봉호는 스스로 모든 일을 책임지기로 결심 동지들을 구한 후 홀로 총 책임을 지고 왜경의 심판을 받도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12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의 언도를 받아 대구 형무소에 수감 복역하다가 서기 1920년 4월 28일 옥사하도다.
약력(略歷)
조봉호(趙鳳鎬)는 서기 1884년 5월 12일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에서 조만형(趙萬馨)의 장자로 태어나다.
일찌기 숭실 학교에서 수학한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제주 성내교회 이기풍(李基豊) 목사와 더불어 조사로 사무하였으며 서기 1912년에는 북제주군 애월면 금성리에 교회를 설립 기독교 선교활동을 위해 진력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서기 1919년 7월 독립군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 복역 중 서기 1920년 4월 28일 순국하였으니 당시 나이 38세이다.
정부에서는 조봉호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다.
殉國志士 趙鳳鎬 紀念碑(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殉國志士 趙鳳鎬 紀念碑)
조봉호(趙鳳鎬는 1884年 한림읍(韓林邑) 귀덕리(歸德里) 부농(富農) 조만형(趙萬馨)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19세 때 유학을 떠나 경신(儆新), 숭실학교(崇實學校) 등(等)에서 수학(修學)하여 기독교(基督敎)에 귀의(歸依)한 후(後) 1912年 애월읍(涯月邑) 금성리(錦城里)에 교회(敎會)를 건립(建立)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9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樹立)되자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를 조직(組織)하여 회원(會員) 4,550여명(余名)으로부터 헌금(獻金) 일만(壹萬)원을 모아 하여 상해(上海)로 송금(金送)한 사실이 탄로되어 주동자(主動者) 60여명(余名)이 체포되었다. 그는 동지(同志)들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모든 책임(責任)을 홀로 감당하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복역중(服役中) 1920年 4月 28日 38歲의 나이로 옥사(獄死)하였다.
그는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조국독립(祖國獨立)을 위하여 희생(犧牲)하였으나 유해(遺骸)도 유가족(遺家族)에게 인도(引渡)되지 않았다. 그가 잠든 묘(墓)도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7년 도민(道民)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愛國精神)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어 기념비(記碑)를 세웠다. 또 정부(政府)에서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을 유가족(遺家族)에게 내리고 순국지사(殉國志士)의 칭호도 허용(許容)하였다.
殉國志士 趙鳳鎬 紀念碑(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