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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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산4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귀포시 하원동 산 43 원만사 입구 법정사 항일운동 주역 창건주 방동화 승려 기념비를 찾아가고 있다.
원만사 중창불사 시주자 방명비
법정사 항일운동 주역 창건주 방동화 승려 기념비라고 해서 왔는데, 영주 제1도장 한라산 원만사 사적비이다.
瀛州第一道場漢拏山圓滿寺事蹟碑(영주제1도장 한라산원만사 사적비)
瀛州第一道場漢拏山圓滿寺事蹟碑
영주제1도장 한라산원만사 사적비
원만사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43번지 광대코지에 있다. 진산은 한라산 당산은 법정악이며 광대코지는 목장지대로 매우 넓고 아늑하여 문섬에서 부터 마라도까지 조망할수가 있고 서쪽에는 하원천이 흐른다. 원만사는 1923년 3월 방동화 대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법당을 초당으로 창건한 대선사는 1918년 10월 5일 법정사에서 항일항쟁을 봉기하셨다가 옥고를 치르시고 난 다음 지역의 불자들을 위해 포교활동에 전념하시었으며 4.3사건으로 인하여 초당이 모두 소실되었다. 1961년 3월 회수마을 김익순거사와 양법연화보살을 비롯한 7명이 법당을 신축하고자 이곳에 움집을 짓고 불상을 모시어 산신과 칠성기도를 하던중 1962년 7월 청파당 서시용대선사께서 방동화 대선사의 부탁을 받고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셨다. 1963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일에 정무생보살이 애자 고차용과 함께 입산하여 청파 대선사를 친견하였고 1963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고차용은 동화대선사를 계사로 청파대선사를 은사로 모시어 사미10계를 받으니 법명이 진법이다. 1967년 4월 8일 부터 진법은 보림사에서 금담선사께 사미과와 사집과를 강의 받았다. 1968년 3월에는 정무생보살이 보살계를 받아 계명이 심연화가 되었으며 이때 신심이 용약한 정심연화 보살이 사재를 드려 현재 사찰부지를 매입하면서 함석으로 법당 25평을 새로지어 부처님을 모셨다.

1969년 7월 7일 청파 대선사는 진법을 원만사 감원으로 임명하였고 1971년 2월 신도회에서 후원 15평과 7월에는 심연화 보살이 요사체 10평을 다시 사재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1972년 7월 21일 청파대선사께서 세수 74세 승납 52세로로 입적하시니 대선사의 사법사좌인 진법화상이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여 대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청파당 시용대선사는 1899년 5월 15일 서귀포시 도순동 852번지 아버지 서봉인과 어머니 이계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본관은 이천이며 속명은 시용이다. 청파당은 어려서부터 불심이 충만하여 살생을 싫어하였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라 한일합방으로 민족
瀛州第一道場漢拏山圓滿寺事蹟碑
영주제1도장 한라산원만사 사적비
원만사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43번지 광대코지에 있다. 진산은 한라산 당산은 법정악이며 광대코지는 목장지대로 매우 넓고 아늑하여 문섬에서 부터 마라도까지 조망할수가 있고 서쪽에는 하원천이 흐른다. 원만사는 1923년 3월 방동화 대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법당을 초당으로 창건한 대선사는 1918년 10월 5일 법정사에서 항일항쟁을 봉기하셨다가 옥고를 치르시고 난 다음 지역의 불자들을 위해 포교활동에 전념하시었으며 4.3사건으로 인하여 초당이 모두 소실되었다. 1961년 3월 회수마을 김익순거사와 양법연화보살을 비롯한 7명이 법당을 신축하고자 이곳에 움집을 짓고 불상을 모시어 산신과 칠성기도를 하던중 1962년 7월 청파당 서시용대선사께서 방동화 대선사의 부탁을 받고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셨다. 1963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일에 정무생보살이 애자 고차용과 함께 입산하여 청파 대선사를 친견하였고 1963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고차용은 동화대선사를 계사로 청파대선사를 은사로 모시어 사미10계를 받으니 법명이 진법이다. 1967년 4월 8일 부터 진법은 보림사에서 금담선사께 사미과와 사집과를 강의 받았다. 1968년 3월에는 정무생보살이 보살계를 받아 계명이 심연화가 되었으며 이때 신심이 용약한 정심연화 보살이 사재를 드려 현재 사찰부지를 매입하면서 함석으로 법당 25평을 새로지어 부처님을 모셨다.

1969년 7월 7일 청파 대선사는 진법을 원만사 감원으로 임명하였고 1971년 2월 신도회에서 후원 15평과 7월에는 심연화 보살이 요사체 10평을 다시 사재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1972년 7월 21일 청파대선사께서 세수 74세 승납 52세로로 입적하시니 대선사의 사법사좌인 진법화상이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여 대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청파당 시용대선사는 1899년 5월 15일 서귀포시 도순동 852번지 아버지 서봉인과 어머니 이계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본관은 이천이며 속명은 시용이다. 청파당은 어려서부터 불심이 충만하여 살생을 싫어하였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라 한일합방으로 민족
瀛州第一道場漢拏山圓滿寺事蹟碑
영주제1도장 한라산원만사 사적비
원만사는 서귀포시 하원동 산43번지 광대코지에 있다. 진산은 한라산 당산은 법정악이며 광대코지는 목장지대로 매우 넓고 아늑하여 문섬에서 부터 마라도까지 조망할수가 있고 서쪽에는 하원천이 흐른다. 원만사는 1923년 3월 방동화 대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법당을 초당으로 창건한 대선사는 1918년 10월 5일 법정사에서 항일항쟁을 봉기하셨다가 옥고를 치르시고 난 다음 지역의 불자들을 위해 포교활동에 전념하시었으며 4.3사건으로 인하여 초당이 모두 소실되었다. 1961년 3월 회수마을 김익순거사와 양법연화보살을 비롯한 7명이 법당을 신축하고자 이곳에 움집을 짓고 불상을 모시어 산신과 칠성기도를 하던중 1962년 7월 청파당 서시용대선사께서 방동화 대선사의 부탁을 받고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셨다. 1963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일에 정무생보살이 애자 고차용과 함께 입산하여 청파 대선사를 친견하였고 1963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에 고차용은 동화대선사를 계사로 청파대선사를 은사로 모시어 사미10계를 받으니 법명이 진법이다. 1967년 4월 8일 부터 진법은 보림사에서 금담선사께 사미과와 사집과를 강의 받았다. 1968년 3월에는 정무생보살이 보살계를 받아 계명이 심연화가 되었으며 이때 신심이 용약한 정심연화 보살이 사재를 드려 현재 사찰부지를 매입하면서 함석으로 법당 25평을 새로지어 부처님을 모셨다.

1969년 7월 7일 청파 대선사는 진법을 원만사 감원으로 임명하였고 1971년 2월 신도회에서 후원 15평과 7월에는 심연화 보살이 요사체 10평을 다시 사재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1972년 7월 21일 청파대선사께서 세수 74세 승납 52세로로 입적하시니 대선사의 사법사좌인 진법화상이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여 대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청파당 시용대선사는 1899년 5월 15일 서귀포시 도순동 852번지 아버지 서봉인과 어머니 이계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본관은 이천이며 속명은 시용이다. 청파당은 어려서부터 불심이 충만하여 살생을 싫어하였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라 한일합방으로 민족
정기가 점자 쇠퇴됨을 한탄하면서 불심으로 지역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1924년 2월 15일 경주 기림사에서 오이화 대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927년 3월 3일 제주 관음사에서 묵담 대종사를 전법사로 모시고 대승계를 수지하고 난후 부처님의 교리와 산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교화에 진력하고자 일본으로 전너가셔서는 진언종의 국분사에 머무르시며 중등과를 수료하셨다. 1928년 4월 7일에는 나라따산 관음사로 가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료하셨으며 1930년 3월 15일 코오베로 옮겨 재일동포들을 위해 포교사로서 교화활동을 전개하셨다. 1932년에 귀국하여서는 12월 8일 기림사에서 대덕법계를 받았으며 그후 백양사에서 묵담 대종사를 전법사로 입실건당하니 호를 청파라 하였다. 1950년에는 고향인 제주도로 오셔서 3월 1일에 서귀동 구룡사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62년 7월 방동화대선사의 부탁에 따라 원만사에 주석하시면서 입적하실때까지 10여년동안 정심연화보살을 전생 보단으로 반연하여 함께 기도와 정신을 통해 원만사 중창불사의 초석을 다져 놓으셨다. 1979년 3월 진법 화상은 원당사에서 묵담대종사를 모시고 대승계를 주시하면서 법명을 진법에서 정법으로 받았고 1981년 9월 2
정기가 점자 쇠퇴됨을 한탄하면서 불심으로 지역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1924년 2월 15일 경주 기림사에서 오이화 대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927년 3월 3일 제주 관음사에서 묵담 대종사를 전법사로 모시고 대승계를 수지하고 난후 부처님의 교리와 산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교화에 진력하고자 일본으로 전너가셔서는 진언종의 국분사에 머무르시며 중등과를 수료하셨다. 1928년 4월 7일에는 나라따산 관음사로 가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료하셨으며 1930년 3월 15일 코오베로 옮겨 재일동포들을 위해 포교사로서 교화활동을 전개하셨다. 1932년에 귀국하여서는 12월 8일 기림사에서 대덕법계를 받았으며 그후 백양사에서 묵담 대종사를 전법사로 입실건당하니 호를 청파라 하였다. 1950년에는 고향인 제주도로 오셔서 3월 1일에 서귀동 구룡사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62년 7월 방동화대선사의 부탁에 따라 원만사에 주석하시면서 입적하실때까지 10여년동안 정심연화보살을 전생 보단으로 반연하여 함께 기도와 정신을 통해 원만사 중창불사의 초석을 다져 놓으셨다. 1979년 3월 진법 화상은 원당사에서 묵담대종사를 모시고 대승계를 주시하면서 법명을 진법에서 정법으로 받았고 1981년 9월 2
일 성광사에서 동산대선사를 법사로 입실 건당하니 호를 석천이라 하였다. 1982년 1월에는 ○○○생도반으로 반연하였고 1986년에는 원당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 1988년 ○○○○사이에서 ○○과를 졸업하였다. 1985년 정법 화상은 심연화 보살과 불자들의 뜻을 모아 전기를 가설하였고 1989년 7월 진입로를 개설포장하였다. 1994년 10월 팔작지붕의 대웅보전 35평을 지어 중창하면서 청동삼존불인 아마타여래와 관음 세자보살 후불탱화를 모셨다. 19954월에는 강당인 선불장 40평과 전등실 30평을 신축하였다. 1997년에는 원통각을 지어 처음 법당에 모셨던 관세음보살과 나반존자와 산신탱화를 옮겨 모시면서 대웅전과 원통각에 단정불사를 아혔으며 1999년 4월에는 대웅전에 닫집불사와 함께 후불탱하를 모셨다. 원만사는 처음 동화 대선사께서 초당으로 인연을 심었고 4.3으로 소실된 초당을 청파대선사께서 증창의 기를 다져놓았으며 영주제1불도장인 원만사를 산남불맥의 구심지로 만들어 불자들의 염원을 성취시겠다는 정무보살의 크고 넓으신 대원력과 불사들의 성원에 힙입어 석천 화상이 대웅보전을 중창 할 수가 있었느니 어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불사를 원만하게 성취할수가 있었던것은 청파대선사의 볍력에 감복하여 연연히 이어온 불자들의 뒷받침이 큰힘이 되었으니 이 모두가 불보살님들의 하염없는 자비광명이 그 빛을 발하였기 때문이다.

더욱 이 원만사에는 산물이라는 샘물이 바위에서 솟아나와 산신과 독성칠성 기도에 특히 영험이 있으니 원만사의 신도가 줄어들지 않고 운집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하나 이는 정법화상이 동사섭으로 대원력을 나타내면서 용맹기도와 정신을 하여 오고있기 떄문이다. 이제 상법이 가고 말법이 도래하고 있으나 이곳 영주제일불도량인 원만사에는 불자들의 신심이 날로 넘쳐 흐르고 불보살님들의 하염없는 대광명속에 석천화상과 심연화 잔선화 두 보살이 如來不動地를 수호가고 있으니 말법시대의 불보살의 가피가 여기에서 발원치않는다고 누가 감히 의심을 하며 야부가 설파한 山是水 水是水 水佛在甚魔處가 바로 원만사가 아님을 누가 있어 부정할수 있으리요
일 성광사에서 동산대선사를 법사로 입실 건당하니 호를 석천이라 하였다. 1982년 1월에는 ○○○생도반으로 반연하였고 1986년에는 원당사에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 1988년 ○○○○사이에서 ○○과를 졸업하였다. 1985년 정법 화상은 심연화 보살과 불자들의 뜻을 모아 전기를 가설하였고 1989년 7월 진입로를 개설포장하였다. 1994년 10월 팔작지붕의 대웅보전 35평을 지어 중창하면서 청동삼존불인 아마타여래와 관음 세자보살 후불탱화를 모셨다. 19954월에는 강당인 선불장 40평과 전등실 30평을 신축하였다. 1997년에는 원통각을 지어 처음 법당에 모셨던 관세음보살과 나반존자와 산신탱화를 옮겨 모시면서 대웅전과 원통각에 단정불사를 아혔으며 1999년 4월에는 대웅전에 닫집불사와 함께 후불탱하를 모셨다. 원만사는 처음 동화 대선사께서 초당으로 인연을 심었고 4.3으로 소실된 초당을 청파대선사께서 증창의 기를 다져놓았으며 영주제1불도장인 원만사를 산남불맥의 구심지로 만들어 불자들의 염원을 성취시겠다는 정무보살의 크고 넓으신 대원력과 불사들의 성원에 힙입어 석천 화상이 대웅보전을 중창 할 수가 있었느니 어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불사를 원만하게 성취할수가 있었던것은 청파대선사의 볍력에 감복하여 연연히 이어온 불자들의 뒷받침이 큰힘이 되었으니 이 모두가 불보살님들의 하염없는 자비광명이 그 빛을 발하였기 때문이다.

더욱 이 원만사에는 산물이라는 샘물이 바위에서 솟아나와 산신과 독성칠성 기도에 특히 영험이 있으니 원만사의 신도가 줄어들지 않고 운집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하나 이는 정법화상이 동사섭으로 대원력을 나타내면서 용맹기도와 정신을 하여 오고있기 떄문이다. 이제 상법이 가고 말법이 도래하고 있으나 이곳 영주제일불도량인 원만사에는 불자들의 신심이 날로 넘쳐 흐르고 불보살님들의 하염없는 대광명속에 석천화상과 심연화 잔선화 두 보살이 如來不動地를 수호가고 있으니 말법시대의 불보살의 가피가 여기에서 발원치않는다고 누가 감히 의심을 하며 야부가 설파한 山是水 水是水 水佛在甚魔處가 바로 원만사가 아님을 누가 있어 부정할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