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1994-3
- 탐방로그
-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1994-3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한공 천 유허지입구에 있는 면암 최익현선생 유적비를 찾아왔다.
면암 최익현선생 유적비는 선생이 1873년(고종 10년) 대원군의 만동묘 및 서원 철폐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기 때문이다.선생은 2년 후 1875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귤림서원 터를 찾아 오현제위께 제사를 올렸고 섬을 둘러보며 견문을 기록하고 이를 시문으로 남겼다.
최익현 선생은 제주 유배 이후 이 서제공의 유허지를 방문하였고, 이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겼는데 이것이 현재의 유허비문으로 남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勉菴 崔益鉉 先生 遺蹟碑(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勉菴 崔益鉉 先生 遺蹟碑(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한라산 남녘에 있는 정의 땅 가시촌은 곧 면암 최익현 선생 흔적이 남은 곳이다. 선생의 자는 찬겸이고 경주인으로 1833년(순조 33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여 청양에 옮겨 살았다. 선생은 1855년(철종 6년) 정시대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1868년(고종 5년)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 시에는 경복관 복원을 위한 당백전 발행의 부당성 등 폐단 4개조를 열거하며 대원군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강한 상소를 올렸다. 이보다 앞서 1873년(고종 10년) 대원군의 만동묘와 서원 철폐에 반대
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위리안치되었다. 1875년(고종 12년) 유배가 풀렸으나 선생은 바로 떠나지 아니하고 먼저 귤림서원 터를 찾아 오현 제위께 제사를 올렸다.또 섬을 두루 돌아보며 선현들이 살았던 마을을 방문하여 그 견문을 기록하고 감상한 풍치를 시문으로 표현한 것이 자못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 문집에 빠져있는데 오직 한라산기와 서제 한천공의 유허비문만 실려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서제 한천공은 고려때 예문관 대제학 시중을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고려의 중흥을 도모하다가 나라가 망하면서 제주에 내려와 이 마을 가시촌을 설촌하여 집을 짓고 선비를 양성하였다. 서제공은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불사이군의 대의로 지조를 지켰다. 면암 선생께서는 국사를 크게 걱정하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정배가 풀린 후 제주 도처를 살피면서 이 곳 가시촌에 들려 서제공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으리라.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남기었는데 그 글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유허비문이다. 비록 장구한 세월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위인의 행적과 뜻은 영원히 한결같음을 느낄 수 있다. 선생께서 이 고을에 이르러 글을 지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그 남겨놓은 풍류가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아 후세들의 도학이 이에 의거하여 어둡지 않았고 삼강오륜이 이에 의지하여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뒷날 이 고을에서 나라의 전패를 지킨 일과 고성리에서 일본 불량배들을 물리친 의거 등은 선생의 우국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리라. 옛 사람들은 현인들이 지나간 곳은 초목도 상하게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그 지은 글이 전해지고 발자취가 남겨진 곳에 서랴. 요즘 크게 변
화된 세태를 만나 풍속이 해이해지고 산천이 바뀌어지니 이곳도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선생은 1906년(광무 10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그해 12월 16일 74세를 일기로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그 올곧은 충절은 마땅히 일월과 함께 빛날 것이니 어찌 위대하다 아니하리오. 이에 선생의 뜻을 높이 기리고자 이 유적비를 세운다.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장 한대섭 글 군위인 오문복 제자 안동인 김응현
서기 2005년 10월 20일 남제주 문화원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장 한대섭 글 군위인 오문복 제자 안동인 김응현
서기 2005년 10월 20일 남제주 문화원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1994-3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한공 천 유허지입구에 있는 면암 최익현선생 유적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