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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273
- 탐방로그
-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2273 광명사 입구 애국지사 벽담 동화 대종사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도란 성할때와 쇠할때가 있는 법이며 나라와 사람도 시절을 잘만날때가 있는 법이다. 한말에 이르러 나라는 파당의 분란에만 골몰할뿐 세계의 조류에 어두어 국력이 쇠퇴하였고 또한 척불과 법려들의 수행이 투철하지 못하여 불가의 종풍이 미약하였다.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국가를 맡은 자들이 공리공론에 빠져 실학에 힘쓰지 아니하고 더구나 사리사용에 눈이 어두워 파쟁으로 정권을 농락하면서 민생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국기가 흔들리고 강산과 백성이 피폐해지기에 이르렀다. 석씨문중에서는 총림과 강원의 논의가 갈라지고 돈교와 점교의 구분이 혼돈되어도 이를 바로잡는이가 적으니 내전도 밝게 아는이가 많지않고 선풍 역시 지작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국운과 불교의 힘이 쇠잔해지고 열강은 이리떼처럼 식민지 획득에 혈안이 되어 조선의 강산을 넘보는 풍운의 시대에 제주 한라산 서귀포 기슭에 한 동자가 출생하였으니 그가 곧 벽담 동화대종사이시다. 사의 휘는 동화요 자는 하룡이고 법명은 묵연이며 호는 벽담이다. 보관은 남양이고 속성은 방씨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15년전인 개국 496년(서기 1887년) 정해 8월 8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천동에서 부 우필과 모 여산송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부 진사공 실규는 입도조로서 고종 13년(서기 1876년) 늑임관으로 본도에 부임하였다. 부 또한 진사로서 관직에 임하였다. 사는 유년시절 체격이 강건하고 총명준수하여 친구들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풍모가 뚜렸하였다. 10세때부터 하원동 김성균하에서 사략통감 사서등을 수학하면서 등과의 꿈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24세되는 융희 4년(1910년) 마침 나라가 일본의 강박으로 병합되는 비운에 처하였다. 국파산하재
의 난세진속의 학문과 출세를 도모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은 사는 출가위승에 뜻을 두고 관음사를 찾았다. 당시 본도에는 불교사찰로는 관음사가 유일하였다. 관음사는 기유년(1909년)에 기공하여 불사중이므로 사는 안도월등과 함께 진력하여 불사를 완료하고 제주해협을 건너 육지로 나갔다. 사는 경북 월성군 양북면 기림사에서 자전도하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니 법명은 묵연이었다. 이떄가 1913년 계축4월 8일이였다. 동년 5월 경북 문경군 대승사 강원에서 김혜옹강백하에 내전을 수학하여 수의과를 수료하였다. 한편 한일합방후 일제의 무단통치는 우리민족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가함으로 처처의 민심은 이민족의 압제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에 사는 경남 연일군 출신인 김연일스님등과 함께 본도로 입도하여 한라산 남록 법정사 도장에 바랑을 내로놓았다. 이곳은 예로부터 피난지로써 전설도시가 전해오는 곳이니 高哉漢山....神守護란 시가 전해져 오는 승지로서 이 지역사람들에게는 큰 의지처였다. 사세는 위급하고 겨레의 통한은 뼈에 사무쳐 조선민중은 갈바를 잃고 헤맸다. 불도는 본시 중생의 편이라 신음하는 동포를 구제하고자 의로운 깃발을 내걸자 법뢰가 서귀포의해를 뒤흔들었다. 3.1독립운동 6개월전인 1918년 10월 5일 본도 좌면도 순리소재 법정사에서 700여명이 봉기하여 중문 왜경주재소와 일제 관헌및 일상인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항일의거를 주도한 사람은 사와 김연일 강창규 김상언등의 스님 12명과 태을교(일명 선도교 전신)의 박주석등이었다.
의거의 만세와 함성이 고창되자 크게 놀란 왜경들은 기마병을 앞세워 총칼로 맨손의 항일의거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거대열일부는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포박하고 구금되어있던 13명을 석방했다. 평소 일제 관헌들의 횡포에 분노를 품고있던 민중들은 왜경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스님들이 만류하였다. 봉기군에 붙잡힌 일본상인들이 구타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들이 간교한 수단으로 조선인의 재물과 논밭을 수탈한것에 비하면 하찮은 일에 불과하였다. 이 항일의거는 이틀간 진행되었으나 결국 일제측의 강력한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관련자가 68명이었고 사를 포함하여 일제측이 선고된 33명의 총형량이 46개월이였고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14명이었으며 옥사자가 5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1919년 법정사 승려들이 주도한 이 항일투쟁은 봉기자의 숫자나 체포된 관련자 및 선고형량에 비추어 볼때 단일 독립의거로는 그 어떠한 항일투쟁보다도 돋보이는 항일의거였다. 더 구나 이 항일의거가 3.1운동 6개월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일제하 독립운동 역사상 그 의의를 대단히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것이다. 사는 이로 인하여 일경에 피검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사는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산망불교를 위하여 법화사복원 서원을 세우고 관음사 대중과 함의하에 스스로 화주를 맡아 노심초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는 39세가 되는 1925년 4월
의거의 만세와 함성이 고창되자 크게 놀란 왜경들은 기마병을 앞세워 총칼로 맨손의 항일의거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거대열일부는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포박하고 구금되어있던 13명을 석방했다. 평소 일제 관헌들의 횡포에 분노를 품고있던 민중들은 왜경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스님들이 만류하였다. 봉기군에 붙잡힌 일본상인들이 구타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들이 간교한 수단으로 조선인의 재물과 논밭을 수탈한것에 비하면 하찮은 일에 불과하였다. 이 항일의거는 이틀간 진행되었으나 결국 일제측의 강력한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관련자가 68명이었고 사를 포함하여 일제측이 선고된 33명의 총형량이 46개월이였고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14명이었으며 옥사자가 5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1919년 법정사 승려들이 주도한 이 항일투쟁은 봉기자의 숫자나 체포된 관련자 및 선고형량에 비추어 볼때 단일 독립의거로는 그 어떠한 항일투쟁보다도 돋보이는 항일의거였다. 더 구나 이 항일의거가 3.1운동 6개월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일제하 독립운동 역사상 그 의의를 대단히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것이다. 사는 이로 인하여 일경에 피검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사는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산망불교를 위하여 법화사복원 서원을 세우고 관음사 대중과 함의하에 스스로 화주를 맡아 노심초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는 39세가 되는 1925년 4월
8일 경남 동래군 북면 범어사에서 승림 만화종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호를 벽담이라 하였다. 동년 강원도 금강산마하부선원에서 6개월간의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43세에 다시 제주도로 돌아온 사는 신심깊은 신도들의 협조로 원만사를 창건하여 주석하였다. 1945년 드디어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이 광복되자 초대 제주교구 교무원장에 추대되어 3대를 역임하던중 본도에서 발생한 43사건으로 원만사가 폐사되는 비운을 당하였다. 1954년 불교계에 이른바 정화운동이라는 명목하에 붕규가 일어나 갈등과 분열을 겪는 가운데 광명사를 개축해 불교 중흥의 만진을 하였다. 1967년 겨울 사는 세연이 다했음을 아시고 붓을 들어 ...... 이라는 열반게를 쓰시고 곧 입적하시니 바로 단기 4312년 2월 28일이었다. 세수 84세요 법랍 55년이었다 아! 슬프다 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봉기하였다가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았고 광복후에는 교계의 분규로 난항을 겪기도 하였다. 사가 신원적하니 한라산에 우뢰가 치고 바다도 오열하여 파도를 일으켰으며 구름도 슬퍼하고 달도 조문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사가 입적에 드신지 28년후인 1995년 8월 15일 일제항일의거에 대한 공적을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사가 가신지 35년이 지난 이제사 제주 중문사 경내에 구비를 세우나니 그 향기는 만고토록 흘거갈것이며 조국독립을 위해 흘리신 혈루는 천추토록 전해지리라. 제주특별자치도 지사 서귀포시장
중문동 2273 광명사입구 애국지사 벽담 동화 대종사비
애국지사 벽담 동화 대종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