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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1
- 탐방로그
-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발생지였던 법정사 터와 발상지탑을 찾기 위해 제주 서귀포시 도순동에 왔다. 당시 법정사는 일본 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져 멸실되었고 현재는 기단석, 돌담 등이 남아있다. 현재는 건물이 남지 않은 발상지 터를 지나 의열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탑을 발견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제주 서귀포시 도순동 산 1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 법정사 터를 찾아가고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서귀포시에서는 1996년도부터 항일운동발상지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왔으며, 2011년도에는 유구지 정비사업을 실시하여 항일운동 발상지(법정사)의 옛터를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주차장~항일운동발상지~한라산둘레길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정비하였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戊午 法井寺 抗日運動 發祥地)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7일(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불교계의 김연일, 방동화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4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스님 등 30여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가면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음)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항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동, 호근동, 영남동 등 각 마을 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 9.3) 새벽 무장할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괒아에서 '큰내'(강정천)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3개를 무단 무너뜨렸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300~400명에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중문리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 장로교의 윤명식과 일행 부용혁을 때려 상처를 힙하고, 중문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으며, 그 중 48명은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있다. 서귀포시에서는 1996년부터 항일운동발상지의 성역화를 추진하여 왔으며, 2004년에는 4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준공되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7일(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불교계의 김연일, 방동화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4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스님 등 30여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가면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음)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항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동, 호근동, 영남동 등 각 마을 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 9.3) 새벽 무장할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괒아에서 '큰내'(강정천)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3개를 무단 무너뜨렸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300~400명에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중문리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 장로교의 윤명식과 일행 부용혁을 때려 상처를 힙하고, 중문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으며, 그 중 48명은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있다. 서귀포시에서는 1996년부터 항일운동발상지의 성역화를 추진하여 왔으며, 2004년에는 4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준공되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종별 :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지정. 2003.11.12.)
명칭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소재지 : 서귀포시 도순동 산1, 하원동 산1-1
면적 : 230.346㎡ (보호구역 189.940㎡)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는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월)까지 이곳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의 김연일(金蓮日)·방동화(房東華)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사전에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한 후, 법정사 신도와 선도교도·민간인 등 4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 발상지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었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가담자 400여명 중 66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었다.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종별 :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지정. 2003.11.12.)
명칭 :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소재지 : 서귀포시 도순동 산1, 하원동 산1-1
면적 : 230.346㎡ (보호구역 189.940㎡)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는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월)까지 이곳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의 김연일(金蓮日)·방동화(房東華)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사전에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한 후, 법정사 신도와 선도교도·민간인 등 4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 발상지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었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가담자 400여명 중 66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었다.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의열사는 위쪽으로 약 1Km를 더 올라가야만 했다.
무오법정사항일항쟁성역화사업은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되었고, 1994년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주민들의 청원이 있었으며, 1995년 중문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하였고, 1996년 무오법정사항일힝쟁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항일운동발상지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2004년도에는 4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등이 준공되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탑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탑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戊午法井寺抗日運動)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 7일(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의 김연일(金連日)·방동화(房東華)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지역주민·선도교도 등 칠백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스님 등 30여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가면서"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음)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 제주시)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리·호근리·영남리 등 각 마을 구장에게 격문을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 9. 3)새벽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 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내(江汀川)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 무너뜨렸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400~700명에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중문리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小泉淸身), 장로교의 윤식명(尹植明)과 일행 부용혁(夫容赫)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중문 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 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다.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일부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사업은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되면서 부터이다. 이전까지는 보천교도의 난 등으로 폄하되어 왔으나, 1994년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주민들의 청원이 있었으며, 1995년 중문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하였고, 1996년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항일운동 발상지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2004년도에는 7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등이 준공되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戊午法井寺抗日運動)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 7일(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의 김연일(金連日)·방동화(房東華)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지역주민·선도교도 등 칠백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스님 등 30여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가면서"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음)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 제주시)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리·호근리·영남리 등 각 마을 구장에게 격문을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 9. 3)새벽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 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내(江汀川)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 무너뜨렸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400~700명에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중문리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小泉淸身), 장로교의 윤식명(尹植明)과 일행 부용혁(夫容赫)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중문 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 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다.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일부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사업은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되면서 부터이다. 이전까지는 보천교도의 난 등으로 폄하되어 왔으나, 1994년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주민들의 청원이 있었으며, 1995년 중문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하였고, 1996년 무오 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항일운동 발상지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2004년도에는 7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등이 준공되었다.
항일운동 송치자 66명 형사사건, 수형인 명부(나이순)
김연일, 강창규,박주석,방동화, 김상언, 김삼만,양남구, 장림호,최태유,정구용,문남규,고용석,김인수,강수오,강춘근,김봉화,강봉환,김무석,조계성,강민수,김용충,이윤편, 이승민,이종창,문남은,오병윤,김성수,김두삼,이달생,최신일,김기수,김명돈,이춘삼,양봉(梁鳳),김항률,원인수,김인송,지축생,강두옥,현무생,지갑생,오인식,강순봉,강태하,송을생,김창호,이원영,이봉규,박경흡,이자춘,원성춘,김병일,김인호,고기동,조인혁,문남진,강영준,이무현,이세인,최문수,한윤옥,김윤석,강익(康翼),현재천,강기추,오인석
김연일, 강창규,박주석,방동화, 김상언, 김삼만,양남구, 장림호,최태유,정구용,문남규,고용석,김인수,강수오,강춘근,김봉화,강봉환,김무석,조계성,강민수,김용충,이윤편, 이승민,이종창,문남은,오병윤,김성수,김두삼,이달생,최신일,김기수,김명돈,이춘삼,양봉(梁鳳),김항률,원인수,김인송,지축생,강두옥,현무생,지갑생,오인식,강순봉,강태하,송을생,김창호,이원영,이봉규,박경흡,이자춘,원성춘,김병일,김인호,고기동,조인혁,문남진,강영준,이무현,이세인,최문수,한윤옥,김윤석,강익(康翼),현재천,강기추,오인석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戊午 法井寺 抗日運動)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으며 당시 항일 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일부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戊午 法井寺 抗日運動)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으며 당시 항일 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일부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