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창의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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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마을 무성서원 앞 병오창의기적비를 찾아왔다.
무성서원은 신라 말의 유현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중종때 태인현감이던 신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잠, 정극인, 송세림,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의 향현을 배향 하였다.
구한말에는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여 일어선 면암 최익현이 이 곳에 내려와 돈헌 임병찬과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그는 회문산을 중심으로 의병창의를 했다.
많은 선정비각등이 서있었다.
丙午倡義記蹟碑(병오창의기적비)
구한말 을사조약(1905년)에 분개해 일어선 의병들의 뜻을 기리기위해 1992년에 세워진것이다.
병오창의기적비
최고은과 신령천이 치현하고 이일제가 강학하며 정불우헌 송눌암, 정묵제,김성제, 김명선이 이어 풍화하던 옛 태산이 고을은 군자향이다.
고로 이곳에 무성서원이 서고 여기에서 선비들이 창의한것은 우연한일이 아니다. 한말의 국운은 기울어 왜적은 을미조약을 체결하하고 국권을 강탈하니 이에 언론은 이를 규탄하고 일부 조신과 전국 각처의 유생들은 늑약의 무효와 오적의 참수를 상소하다. 시종무관 민영환이 고 동포문을 남기고 자문함에 순국하는 열사가 잇따르니 항왜의병활동은 격화하여 익년 병오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다. 이때에 일어난 무성서원의 병오창의는 호남의 다수의사들이 최익현을 맹주로 기치를 들다.이를 계기로 그 기세가 호남전역에 떨치다. 당초 최익현은 을사늑약의 파기를 상소하고 왜적의 죄상을 통박하여 왜정부와 외국공관에 보냈으나 대세를 돌이킬수없음을 알고 통분하던 중 문인 고석진, 최제학의 정론을 받아들여 호남으로 내려와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에서 거사를 준비중인 임병찬과 창의하기로 하니 이는 고석진의 식견
최제학의 국량 그리고 임병찬의 경론을 믿어기 때문이다. 임병찬이 최익현을 맞아 집지례를 올리자 스승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의군의 병권을 일임하니 병오3월초1일의 일이다. 최익현은 동지를 순방중 진안 최제학의 장수처인 삼우당에서 이호용, 정백현등과 방책을 논의하며 각처에 제휴를 청하고 종성리로 돌아와 내방의사들을 접견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창의소에 출입한 의사중 기우만, 고광순, 김상기, 이항선, 이석용, 이규홍, 양윤숙등은 이 거사후 각처에서 의진을 영도하다. 한편 임병찬은 결정된 거사일인 윤4월 13일에 김셩상, 김기술, 김식술, 유종규, 권재일등의 협조로 무성서원에 유림을 모으고 포수를 소집하다. 최익현은 4월 초2일에 창의소를 올리고 초8일에 담양 용상사에서 기우만등 유림 50여명과 회동하여 동맹록을 작성하고 격문을 각읍에 띄우다. 4월 13일 무성서원에 당도한 최익현은 먼저 봉번하고 김?에게 시도기를 적게하다. 강회를 마친다음 창의 할 뜻을 밝히니 원종자가 80여명이라. 때에 임병찬의 의병 백여명이 합세하니 각부를 정한다음 대오를 정돈하고 바로 태인읍에 들어가 읍민을 모아 창의사실을 알리고 왜적의 16 대죄 성토문을 왜공관에 발송하고 바로 연내무기를 거두다. 때에 김우섭이 수인과 함께 종군을 원하므로 잔류하여 첩보할것을 명하다. 14일 정읍에서 또 무기를 거두고 내장산에 유진중 고룡진, 김재구, 강종회가 영솔한 포군 30여명이 가세하니 의병이 300여명이라. 15일 손종궁이 이를 좌우익으로 분진 일장조련하니 군용이 숙연하다. 진군중 귀암사에 영숙하는데 채영찬이 포수 십수명을 인솔입진하다. 16일 순읍민의 출영을 받고 수성장을 불러 총포를 거두자 포수 십수명을 이끌고 황균창, 김갑술, 양윤숙등이 오니 강종회를 화포장, 김갑술을 수포수로 삼아 정군하고 바로 왜병일대를 격퇴하여다. 곡성, 순창을 순면중 의병수는 배증하고 또 김송현, 엄덕조가 포수 수십명을 이끌고와 초군수는 600이 되고 19일에는 800명에 이르다. 순창읍에서 또 왜병 수십을 격퇴하고 문서와 무기등을 ?획하다. 20일 왜적의 앞잡이 진위대가 전후로 협공해오니 최익현이 동족상잔은 불가라하여 그들에게 퇴거하라하고 의병도 해산을 명하다. 그러나 의병 백여명이 차마 떠나지 못하는데 때에 진위대가 사격을 해오니 총성이 진동하고 총탄이 비오는듯하다. 때에 정이해가 적탄에 순국하고 임병찬,고석진, 김시술, 유종슈, 최제학, 문달환, 임현주, 조우식, 조영선,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양재해등 13의사가 최후까지 맹주와 더불어 남아 곧 피체되어 형옥을 치르다.
이 밖에 막하에서 호위하던 의사 채영찬, 김갑술이 있어 이들로 하여금 기밀문서를 비장탈출게 하다. 임병찬과 함께 대마도에 감금된 최익현은 그해 11월 17일 끝내 항왜순정하고 임병찬은 후일 고종황제의 밀지로 재거하려다 구금되어 거문도에서 순절하며 제의사들도 각 의진에서 맹약하다. 아 장렬하도다. 국파군망지추에 호수단심의 최익현선생과 의혈국강한 호남의사 제공들이여. 이곳 무성서원에서 드높이 거의의 깃발이여. 이 거룩한 사적을 길이 흠모기념하고자 각계인사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