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치만 공적비,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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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25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국독립전쟁은 국내 의병항일 군사력이 무너져 임시정부의 광복군중심이 되도록 지지하였고, 1916년에는 광무황제 유명서를 제작 민족정기의 혼을 일깨워 일본군국주의침략이 부당함을 국내외에 선언 신통술(주술)에 능통한 임자문을 주동 국내거주 일본인들을 신통술로 죽게한다고 유포 불안감에 떨게 하는등 비밀결사조직을 통하여 암행어사 마패를 이용 전국 각도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는 지혜로 인도주의적 저항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 맨주먹으로 이천만 민족이 독립만세를 불러 세계각국의 평화주의자들에게 경이로움을 주었던 3.1정신의 가교가 되고 조국광복을 향한 희망
의 불꽃이 되어 1919년 일본경찰에 8인의사 전원이 체포 경성고법판결(동년 7월 7일) 각 유배형으로 이용규의사 경남 욕지도등 진치만의사는 평북 신미도 귀향지에서 고난과 절망감을 극복 애국혼을 지키며 토착민에게 인륜의 예절뜻을 굽히지 않는 민족의식의 교육에 전념 건강이 악화 1년후 귀향하지만 1918년 임병찬의사부터 생사를 함께한 이용규의진의 의병 돌격장이었던 곽한일등과 항일우국동지를 재규합하던중 검거되어 1개월 옥고를 치르고 1919년 3.1운동당시 정읍지역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도피 은둔생활을 히작 국내 항일세력이 3.1운동후 철저한 색출을 피해 국외로 떠나 쇠약해진 건강으로 임시정부에 합류를 못한 선생은 가족 모두가 일본경찰의 가혹한 탄압속에 홀로 외로히 망국의 한을 품은채 49세에 순국 입압산 선산으로 안장하셨다. 거룩한 정신을 흠모 의사로 칭하였고(일본) 1994년 8월 15일 광복절 정부는 대한민국 독립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 제2묘역 705호에 안장 순국선열을 추모하시니 효친충군애하고 역사의 암흑기를 강인한 용기와 자주독립 일념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진력(1895~1925) 30여년 헌난한 가시밭길속에서 선각자의 일생을 살다가신 유업을 영구보존하고 숭고한 겨레사랑을 후세에 전하기위하여 고향마을에 탄신 123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유적비를 건립합니다.
항일 애국지사 진치만 공적비. 월정 진치만 1876~1925년 선생 조선말기 한반도가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된 국난극복 시대상황(정신)에 맞서 수학의 길을 정진하시다 '충효 없이는 학문도 종교도 없다'는 뜨거운 가슴과 선구자의 용기를 발휘하여 19세 나이로 창의에 가담.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단발령 등 주권국가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의분 스승이신 기삼연 기우만 호남우도 의병대장(전남) 대열과 함께 하고 고종황제의 의병해산령으로 향리에서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식 고취와 제자를 양성하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후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에 면암 최익현 돈헌 민병찬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의병장(전북) 대의를 따라 국권회복운동 독립의군부 활동을 하였고 1910년 일한합방에 군산(옥구)출신 전오풍 문형모 애국지사와 동지규합및 군자금 마련에 나서 봉기할 기회를 도모하던중 1913년 여양전씨 시조(관향) 현 홍성에서 춘당 이용규 의병대장(충남) 등 전국의 8인 유림대표와 진충보국을 결의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 서신을 보내고 일본군을 상대로 홍성 예산지역 전투에 참여하는 지속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1916년 광무황제 유명서를 제작 일본군국주의 침략이 부당함을 국내외에 알리고 마패를 이용 독립운동세력 확장에 나섰으나 1917년 5월 일경이 정황을 탐지 홍성경찰서에 피체되어 선생은 평안북도 신미도에 1년간 유배, 귀향 한 후 1918년 김태영, 곽한일의병장과 항일애국동지를 재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1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19 3.1독립만에운동에 정읍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도중 발각되어 실패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해임시정부에 참여코다 마지막 애국혼의 불꽃을 지피워 병약해진 심신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민족자존을 지켜 시련과 역경속의 일생을 일제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조국독립을 위한 한의 염원을 간직한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고 1997년 묘소는 입암산 선영에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영면) 1999년 공적비를 세워 민족정신문화의 소중함과 치열한 삶 시대상황(정신)에 맞서 지혜와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희망의 빛을 찾고자 한다.
21세기 화두 통일한국 일본재무장 시각을 만족정기 선양의 의미속에
평화를 사랑하였던 월정의 종선여류 인생역정과 함께 되돌아 봅니다.
2003년 8월
전북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255-1 영안마을입구 항일애국지사 진치만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항일애국의사 진치만공적비
항일애국의사 진치만공적비
● 1876.7 ~ 1925.8
● 독립의군부 가입활동
● 광무황제 유명서(諭命書) 제작
● 평북 신미도 유배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705 안장
1998.7
후손일동
월정 진치만애국의사 유적비
월정 진치만(1876.7.25~1925.8.7)선생은 정읍 입만 천원 253번지에서 출생 고려 인종4년(서기 1126년)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대공신 진용후 신호위 상장군이 여양(홍성)군으로 봉을 받아 시조가 되신 관향 대장군 광의추밀부사대장 광현5형제 매호공파 4세조 한림학사 진화집의공계 13세조 대사헌 진우(김제 만경) 선조의 26세손으로 인품이 강직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의술이 미약한 당시 통정대부를 지내신 부 야은 진정필의 병환에 생사가 위태로우니 단지수혈로 간병 이연일년지수하였고 유년시절 학문은 천품총명하시어 조선말 청나라 사신도 찬탄한호남의 명문이신 기삼연 기우만선생으로부터 수학 19세기 조선제국이 부국강병에 실패 일본군국주의가 청일전쟁을 승리하며 조선을 강점 1895년 국모(민비)시해사건, 단발령으로 국정을 위협 민족문화유산 말살과 내정간섭에 격분한 청년 진치만은 임진왜란과 국난의 위기시 마다 구국의 중심세력이었던 선비정신의 대의를 위하여 호남 우도 의병대장 기삼연 기우만스승의 의병에 19세 나이로 참여하나 고종황제의 의병해산령으로 실패 향리에서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식고취와 교육의 중요성을 느껴 제자를 양성하던중 1906년 학문교류로 뜻을 도모하여 정읍 산내면 유생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의병장 돈헌 임병찬과 함께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발군한 면암 최익현의진에 동참하나 최익현 임병찬선생이 대마도유배 순국하여 실패 1910년 한일합방후 국권회복의거에 적극가담 전북 옥구출신 전오풍 문형모와 독립의군부를 조직 전라지역을 중심으로 의병부대편성 동지규합활동 암약타가 1913년 선생의 관향인 홍성의거에 의병대장 춘당 이용규 충남 윤병일 이만직 이내수 김태영 경성 전용규 손병일 전북 진치만등 88의사 가 유생 지도자세력으로 재집결 진충보국을 결의 일본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 서신을 발송하고 서천 홍성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나 예산전투를 패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