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65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만석보 조감도
연혁
. 1892년(고종 29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축조
. 1894년(고종 31년) 농민군이 혁파
. 1898년(광무 2년) 고부군수 안길수가 완전 철거
연혁
. 1892년(고종 29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축조
. 1894년(고종 31년) 농민군이 혁파
. 1898년(광무 2년) 고부군수 안길수가 완전 철거
萬石洑 遺址(만석보 유지)
萬石洑 遺址(만석보 유지)
지방기념물 만석보 제33호
만석보터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만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만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萬石洑 遺址碑(만석보 유지비)
萬石洑 遺址碑(만석보 유지비)
이곳은 갑오동학혁명을 유발한 민원의 일대표적이었던 만석보의 유지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상류에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사역하여 이 보를 맊고 보의 윗논은 1두락에 2두 아랫논은 1두락에 1두식 일찌기 없었던 보세를 받는 등 갖은 폭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1894년 갑오 2월에 전봉준 장군의 영도 아래 궐기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마침내 만석보를 훼파하고야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동학혁명의 발단이었다.
이에 우리는 이 유지비를 세워 불의에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되새며 나아가서는 갑오동학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기리 기념코저 하는 바이다.
서기 1973년 5월 11일 문학박사 김상기 근식
이에 우리는 이 유지비를 세워 불의에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되새며 나아가서는 갑오동학혁명의 대의를 받들어 기리 기념코저 하는 바이다.
서기 1973년 5월 11일 문학박사 김상기 근식
건립자 정읍군수 김삼주
주관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송성용 전면서
서병익 후면서
주관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
송성용 전면서
서병익 후면서
만석보 유지 정화 기념비
이 자리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발단이 된 만석보 유지이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세운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은 우리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선열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높은 뜻을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다.
1987년 10월 1일 전라북도지사
이 자리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발단이 된 만석보 유지이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세운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은 우리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선열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높은 뜻을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다.
1987년 10월 1일 전라북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