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
만석보 혁파 선정비
위치 :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예동마을)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
위치 :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예동마을)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 만석보혁파선정비, 만석보혁파비를 찾았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
위치 :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예동마을)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
위치 :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예동마을)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보(潽.예동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水稅)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戊戌)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安吉壽)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郡守安候吉壽萬石洑革罷善政碑)'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碑文)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비각(碑閣)을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