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세한(歲寒)에 송백의 절개가 알여지고 乨卋(난세)에 의인열사의 고절이 빛난다. 근역 전토가 일제침략에 蹂躪(유린)되고 전세계가 제국주의 발악에 질식되려할 지음에 의인 구파 백정기 의사는 분연히 이러서 이 겨레와 및 전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신성인 성스러운 희생을 밫인 우리나라 무정부주의자의 선구자다. 마츰내 8.15 해방을 맞이하자 이 땅의 겨레들은 선생의 의열을 추모하고 그 높은 뜻을 기리 간즉하고자 선생의 유해를 적지 나가사키(長崎)에서 서울 효창공원 의사묘지에 봉안하니 곳 민족만대의 귀감이신 3의사의 한 분이시다.
선생은 수원 백씨니 명은 정기요, 자는 용선이요, 호는 구파다. 단기 4229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율면 하장리의 빈농인 백남일의 장남으로 태여나서 그 후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음선리로 이주하였다. 유시에 엄친을 여히고 편모슬하에서 가업을 도우며 주경야독하여 장지를 길럿다.
기미 초춘 민족 갱생의 봉화인 3.1운동이 폭발되려 할 지음 선생은 24세의 열혈청년으로 일제와 결사투쟁할겄을 굳게 결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 염출에 동분서주하든 중 동년 8월 계획이 누설되여 1시 봉천 방면으로 피신하고 그후 수3차 국내에 잠입 활동하다가 4255년말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4256년 여름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조천수력발전소 공사장에 은신하여 일황 암살을 계획타가 불의의 동경 震灾(진재)로 동지를 잃고 부득이 익년 4월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4257
선생은 수원 백씨니 명은 정기요, 자는 용선이요, 호는 구파다. 단기 4229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율면 하장리의 빈농인 백남일의 장남으로 태여나서 그 후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음선리로 이주하였다. 유시에 엄친을 여히고 편모슬하에서 가업을 도우며 주경야독하여 장지를 길럿다.
기미 초춘 민족 갱생의 봉화인 3.1운동이 폭발되려 할 지음 선생은 24세의 열혈청년으로 일제와 결사투쟁할겄을 굳게 결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 염출에 동분서주하든 중 동년 8월 계획이 누설되여 1시 봉천 방면으로 피신하고 그후 수3차 국내에 잠입 활동하다가 4255년말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4256년 여름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조천수력발전소 공사장에 은신하여 일황 암살을 계획타가 불의의 동경 震灾(진재)로 동지를 잃고 부득이 익년 4월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4257
세한(歲寒)에 송백의 절개가 알여지고 乨卋(난세)에 의인열사의 고절이 빛난다. 근역 전토가 일제침략에 蹂躪(유린)되고 전세계가 제국주의 발악에 질식되려할 지음에 의인 구파 백정기 의사는 분연히 이러서 이 겨레와 및 전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신성인 성스러운 희생을 밫인 우리나라 무정부주의자의 선구자다. 마츰내 8.15 해방을 맞이하자 이 땅의 겨레들은 선생의 의열을 추모하고 그 높은 뜻을 기리 간즉하고자 선생의 유해를 적지 나가사키(長崎)에서 서울 효창공원 의사묘지에 봉안하니 곳 민족만대의 귀감이신 3의사의 한 분이시다. 선생은 수원 백씨니 명은 정기요, 자는 용선이요, 호는 구파다. 단기 4229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율면 하장리의 빈농인 백남일의 장남으로 태여나서 그 후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음선리로 이주하였다. 유시에 엄친을 여히고 편모슬하에서 가업을 도우며 주경야독하여 장지를 길럿다. 기미 초춘 민족 갱생의 봉화인 3.1운동이 폭발되려 할 지음 선생은 24세의 열혈청년으로 일제와 결사투쟁할겄을 굳게 결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 염출에 동분서주하든 중 동년 8월 계획이 누설되여 1시 봉천 방면으로 피신하고 그후 수3차 국내에 잠입 활동하다가 4255년말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4256년 여름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조천수력발전소 공사장에 은신하여 일황 암살을 계획타가 불의의 동경 震灾(진재)로 동지를 잃고 부득이 익년 4월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4257
년 6월 직접 행동을 주장하는 정열의 선생은 당시 사회를 풍미하든 소련괴뢰 독재적 공산당을 배제하고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무정부주의에 공명하여 마츰내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 동지와 주간지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동년 11월 선생은 다시 노동운동을 전개코저 상해 영인 경영의 철공장 직공이 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일방 중국동지 로검파 및 대만 동지 범본양 등의 화남 아나키스트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진췌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 동지 육불여 모일파 등이 주재하던 상해 공단 연합회를 적극 강화하던 차에 4258년 5월 주일 영일 양국 자본가를 상대로서 유명한 오주 상해 총파업이 이러나자 12만 노동자를 동원하여 갖이 고이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투쟁을 하였다. 4261년 9월 남경에서 한중일 비안인 등 제국동지들로써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자 선생은 한국대표로 출석하였으며 동 연맹기관지 동방편집위원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4263년 10월 당시 북만 해림지구를 기반으로 김좌진 이을규를 비롯하여 해방전 대일 대공 투쟁에서 순절한 김시야 김야운 이준근 엄정순 김야붕 등 동지가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교의 조직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던 중 우리 독립운동을 분열 저해시키기에 혈안이 된 공산도당에게 백야 김좌진 동지가 피살되자 그 복수운동이 이러나 선생은 정화암 김지홍 양여주 등과 급히 해림시로 달리여 그 곳 동지들과 합세하여 공산도당 숙청과 일제 주범박멸에 쇄신혈투하였다. 4264년 9월 만주사변이 폭발되자
년 6월 직접 행동을 주장하는 정열의 선생은 당시 사회를 풍미하든 소련괴뢰 독재적 공산당을 배제하고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무정부주의에 공명하여 마츰내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 동지와 주간지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동년 11월 선생은 다시 노동운동을 전개코저 상해 영인 경영의 철공장 직공이 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일방 중국동지 로검파 및 대만 동지 범본양 등의 화남 아나키스트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진췌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 동지 육불여 모일파 등이 주재하던 상해 공단 연합회를 적극 강화하던 차에 4258년 5월 주일 영일 양국 자본가를 상대로서 유명한 오주 상해 총파업이 이러나자 12만 노동자를 동원하여 갖이 고이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투쟁을 하였다. 4261년 9월 남경에서 한중일 비안인 등 제국동지들로써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자 선생은 한국대표로 출석하였으며 동 연맹기관지 동방편집위원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4263년 10월 당시 북만 해림지구를 기반으로 김좌진 이을규를 비롯하여 해방전 대일 대공 투쟁에서 순절한 김시야 김야운 이준근 엄정순 김야붕 등 동지가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교의 조직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던 중 우리 독립운동을 분열 저해시키기에 혈안이 된 공산도당에게 백야 김좌진 동지가 피살되자 그 복수운동이 이러나 선생은 정화암 김지홍 양여주 등과 급히 해림시로 달리여 그 곳 동지들과 합세하여 공산도당 숙청과 일제 주범박멸에 쇄신혈투하였다. 4264년 9월 만주사변이 폭발되자
선생은 상해로 도라가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 및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 등을 기간으로 항일 해방연맹을 조직하여 서사항일의 선전공작을 하는 중에 제1차 상해사변이 ○기됨에 따라 선생은 이여산 동지와 함께 천진에 잠입하여 일군 수송선 1만 5천돈급 일척을 일청기선부두에서 투탄 대파하고 일군병영 및 일총영사관에 투탄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4266년 3월 왜적이 중국군벌들을 매수고자 주화 대사 유길명을 중심으로 일○정치인이 중국정부 내 친일 거류들이 상해 갑북에서 회합한다는 정보를 접한 선생은 곳 그들의 회의장소를 습격코자 정화암과 밀의하고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동월 17일 하오 9시 일건 진멸하려던 찰라에 적의 불의역습을 받어 불행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여 長崎(나가사키)형무소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 수감 중 4269년 5월 22일 상오 5시 천추의 한을 품은채 옥중 원혼이 되니 향년 41세요 혁명투쟁 10유 5년에 집에는 依閭至情(의려지정)으로 廢盲(폐맹)된 자당 윤씨와 미망인 조씨 및 ○孤械鉉(○고계현)이 있을뿐 분전편토의 유산도 없었다.
단기 4289년 2월 일
동지 이정규 근찬 장흥인 고광은 근서
단기 4289년 2월 일
동지 이정규 근찬 장흥인 고광은 근서
선생은 상해로 도라가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 및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 등을 기간으로 항일 해방연맹을 조직하여 서사항일의 선전공작을 하는 중에 제1차 상해사변이 ○기됨에 따라 선생은 이여산 동지와 함께 천진에 잠입하여 일군 수송선 1만 5천돈급 일척을 일청기선부두에서 투탄 대파하고 일군병영 및 일총영사관에 투탄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4266년 3월 왜적이 중국군벌들을 매수고자 주화 대사 유길명을 중심으로 일군정요인이 중국 정부 내 친일 거두들이 상해 갑북에서 회합한다는 정보를 접한 선생은 곳 그들의 회의장소를 습격코자 정화암과 밀의하고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동월 17일 하오 9시 일건 진멸하려던 찰라에 적의 불의역습을 받어 불행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여 長崎(장기:나가사키)형무소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 수감 중 4269년 5월 22일 상오 5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옥중 원혼이 되니 향년 41세요 혁명투쟁 10유 5년에 집에는 依閭至情(의려지정)으로 廢盲(폐맹)된 자당 윤씨와 미망인 조씨 및 유고 계현이 있을 뿐 분전편토의 유산도 없었다.
단기 4289년 2월 일
동지 이정규 근찬 장흥인 고광은 근서
단기 4289년 2월 일
동지 이정규 근찬 장흥인 고광은 근서
鷗波 白貞基 義士 追慕碑(구파 백정기 의사 추모비)
鷗波 白貞基 義士 追慕碑(구파 백정기 의사 추모비)
구파 백정기 의사 추모비문
백정기 의사는 서기 1896년 음력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에서 부친 백사순씨와 모친 윤옥문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활달하였으며 또한 총명하여 청년시절에 주경야독으로 사서에 통달하였다. 의사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정읍군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1909년 영원면 앵성리의 조팔락씨와 결혼하였다. 의사는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애국심에 불타는 동지들을 모아 우리는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려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1919년 민족자주갱생의 횃불인 3.1운동이 폭발하기 직전 동지들과 함께 죽음으로 항쟁할 것을 맹세하고 만주 심양으로 떠났다. 1920년 경성으로 돌아와 지하운동을 하다가 이듬해 봄 경성 본정(本町) 경찰서에 구속 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석방되었다. 1923년 일황을 주살할 계획으로 동경에 들어갔으나 불의의 동경 대지진과 왜병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의사는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에
백정기 의사는 서기 1896년 음력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에서 부친 백사순씨와 모친 윤옥문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활달하였으며 또한 총명하여 청년시절에 주경야독으로 사서에 통달하였다. 의사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정읍군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1909년 영원면 앵성리의 조팔락씨와 결혼하였다. 의사는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애국심에 불타는 동지들을 모아 우리는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려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1919년 민족자주갱생의 횃불인 3.1운동이 폭발하기 직전 동지들과 함께 죽음으로 항쟁할 것을 맹세하고 만주 심양으로 떠났다. 1920년 경성으로 돌아와 지하운동을 하다가 이듬해 봄 경성 본정(本町) 경찰서에 구속 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석방되었다. 1923년 일황을 주살할 계획으로 동경에 들어갔으나 불의의 동경 대지진과 왜병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의사는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 직공이 되어 중국 동지 노검파 대만 동지 범본양, 아나키스트 연맹과 손을 잡고 노동자의 사상 계몽에 진력한 결과 의사를 따를는 군중이 10만을 헤아렸다. 1927년 남경 상해 등에 있는 조선 중국 동지들을 모아 복건 천주 등지에서 농민자위군으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지방토비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남경에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안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와 1930년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도 의사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 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아나키스트 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과 제휴하여 항일해방연맹을 조직하고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후엔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였으며 이여산 동지와 천진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을 대파하고 왜군 병영과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했으니 서사 항일의 투혼은 크게 빛났다. 1933년 3월 17일 의사는, 일본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유길명 주중일본공사가 마련한 상해 무창로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일본 요정에 일군정요인과 중국의 친일거두들을 초대하여 대연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정화암과 밀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과 함께 그날 밤 9시 일격 전멸을 시도했으나 적의 역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 장기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밤 11시 일본 장기 형무소에서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의사의 유해는 해방이 된 다음해야 조국의 품에 안기셨으니 1946년 7월 6일에 지금의 효창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1956년 10월 30일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 직공이 되어 중국 동지 노검파 대만 동지 범본양, 아나키스트 연맹과 손을 잡고 노동자의 사상 계몽에 진력한 결과 의사를 따를는 군중이 10만을 헤아렸다. 1927년 남경 상해 등에 있는 조선 중국 동지들을 모아 복건 천주 등지에서 농민자위군으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지방토비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남경에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안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와 1930년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도 의사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 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아나키스트 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과 제휴하여 항일해방연맹을 조직하고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후엔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였으며 이여산 동지와 천진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을 대파하고 왜군 병영과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했으니 서사 항일의 투혼은 크게 빛났다. 1933년 3월 17일 의사는, 일본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유길명 주중일본공사가 마련한 상해 무창로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일본 요정에 일군정요인과 중국의 친일거두들을 초대하여 대연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정화암과 밀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과 함께 그날 밤 9시 일격 전멸을 시도했으나 적의 역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 장기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밤 11시 일본 장기 형무소에서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의사의 유해는 해방이 된 다음해야 조국의 품에 안기셨으니 1946년 7월 6일에 지금의 효창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1956년 10월 30일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
도민의 성금으로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후 1963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늘 이 비를 세우는 뜻은 의사가 남기신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그 분을 추모함이며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사는 가셨지만 그분이 남기신 항일독립투사로서의 애국충정과 불굴의 애국혼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할 것이다.
서기 2003년 9월 28일
글 : 운정 김동필
전면 서 : 우산 송하경
서기 2003년 9월 28일
글 : 운정 김동필
전면 서 : 우산 송하경
도민의 성금으로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후 1963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늘 이 비를 세우는 뜻은 의사가 남기신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그 분을 추모함이며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사는 가셨지만 그분이 남기신 항일독립투사로서의 애국충정과 불굴의 애국혼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할 것이다.
서기 2003년 9월 28일
글 : 운정 김동필
전면 서 : 우산 송하경
서기 2003년 9월 28일
글 : 운정 김동필
전면 서 : 우산 송하경
義烈祠創建紀念碑(의열사 창건기념비)
義烈祠創建紀念碑(의열사 창건기념비)
의열사 창건 기념비문
의열사는 항일투사 구파 백정기 의사를 봉안한 사우이다.
의사는 서기 1896년 1월 19일 현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에서 아버지 수원백씨 남일 자 사순과 어머니 파평윤씨 옥문의 장자로 출생하여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 1907년에 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의사는 편모슬하의 가난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 사서를 통달하였고 마침내는 당시 어지러운 시국을 깨닫기에 이르러 일본어를 익히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앞으로의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였다. 의사는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는데는 젊은이들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때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있은 후 서울로 올라가 활동을 하다가 중국 심양과 북경을 내왕하며 이곳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의열사는 항일투사 구파 백정기 의사를 봉안한 사우이다.
의사는 서기 1896년 1월 19일 현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에서 아버지 수원백씨 남일 자 사순과 어머니 파평윤씨 옥문의 장자로 출생하여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 1907년에 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의사는 편모슬하의 가난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 사서를 통달하였고 마침내는 당시 어지러운 시국을 깨닫기에 이르러 일본어를 익히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앞으로의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였다. 의사는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는데는 젊은이들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때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있은 후 서울로 올라가 활동을 하다가 중국 심양과 북경을 내왕하며 이곳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1923년 6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활동을 하면서 노동관계서적을 탐독하여 정치 식견을 넓혔다. 그해 9월 동경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1928년 9월 중국 남경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대회에 조선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기관지 동방의 편집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북만주로 들어가서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1월에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점점 도를 더해가자 의사는 오면직 이강훈 원심창 이달 김기강 류기문 진수방 중국인 전화민 일본인 재야 일랑 등과 흑색공포단이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천진으로 가서 일본수송선을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3년 3월 17일 일제 대륙침략의 원흉들을 당시 주중공사 일본 유길명이 외교적 침략으로 중국의 정계요인과 일본군벌들을 상해공동조계문로에 있던 일본요정 육삼정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이강훈 정화암 오세민 일본인 야타베(矢田部) 등과 그들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 이날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기후 일본장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일본 장기형무소에 서 복역 중 1934년 갑술 음 4월 24일 양 6월 5일 옥중에서 서거하니 향년 39였다. 광복 후 1946년 7월 6일 유해를 일본 장기에서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옮겨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의열사는 1996년 10월 2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다음해 의사 고택근지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번지 주변토지 5939평의 터를 닦아 1997년 10월 31일 기공하였다.
무처 7년 여에 걸쳐 국비 12억원 도비 13억5천만원 시비 18억5천만원 보조로 사당 강당 기념관 등을 완공함에 기 규모가 자못 괄목하고 남음이 있으니 이는 의사의 열렬한 애국정신을 추모함이요 나아가서 민족애의 표징인 것이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북만주로 들어가서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1월에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점점 도를 더해가자 의사는 오면직 이강훈 원심창 이달 김기강 류기문 진수방 중국인 전화민 일본인 재야 일랑 등과 흑색공포단이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천진으로 가서 일본수송선을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3년 3월 17일 일제 대륙침략의 원흉들을 당시 주중공사 일본 유길명이 외교적 침략으로 중국의 정계요인과 일본군벌들을 상해공동조계문로에 있던 일본요정 육삼정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이강훈 정화암 오세민 일본인 야타베(矢田部) 등과 그들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 이날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기후 일본장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일본 장기형무소에 서 복역 중 1934년 갑술 음 4월 24일 양 6월 5일 옥중에서 서거하니 향년 39였다. 광복 후 1946년 7월 6일 유해를 일본 장기에서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옮겨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의열사는 1996년 10월 2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다음해 의사 고택근지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번지 주변토지 5939평의 터를 닦아 1997년 10월 31일 기공하였다.
무처 7년 여에 걸쳐 국비 12억원 도비 13억5천만원 시비 18억5천만원 보조로 사당 강당 기념관 등을 완공함에 기 규모가 자못 괄목하고 남음이 있으니 이는 의사의 열렬한 애국정신을 추모함이요 나아가서 민족애의 표징인 것이다.
서기 2003년 10월 29일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 수
최현식 찬, 지암 류승훈 서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고문 국회의원 김원기 윤철상, 정읍시장 국승록 유성엽
임원
회장 박재복, 부회장 유일종 김명수 전계봉
총무이사 송수철, 재무이사 최병철
이사 최현식 장형식 김흥권 배문환 조정환 황정규 백남균 송주섭 김우술 김재한 이재수 김길수
감사 박기수 권재원
자 백계현
시공회사 혜전건설(주) 대표이사 오무웅
최현식 찬, 지암 류승훈 서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고문 국회의원 김원기 윤철상, 정읍시장 국승록 유성엽
임원
회장 박재복, 부회장 유일종 김명수 전계봉
총무이사 송수철, 재무이사 최병철
이사 최현식 장형식 김흥권 배문환 조정환 황정규 백남균 송주섭 김우술 김재한 이재수 김길수
감사 박기수 권재원
자 백계현
시공회사 혜전건설(주) 대표이사 오무웅
崇義門(숭의문)
崇義門(숭의문)
오른쪽에 위치한 聽義堂(청의당)
왼쪽에 위치한 鷗波紀念館(구파기념관)
義烈門(의열문)
義烈門(의열문)
義烈祠(의열사)
義烈祠(의열사) - 2003년 신춘 김대중
구파기념관 내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 백정기 의사(白貞基 義士) 의열사(義烈祠) 기념관(紀念館)
鷗波 白貞基 義士의 義擧 決意(구파 백정기 의사의 의거 결의)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爭取)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형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共生) 공사(共死)의 맹우 여러분 대륙(大陸)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중국 상해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의 날 침략거두 아리요시(有吉) 일파 도륙을 모의하며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서기 2003년 10월 25일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爭取)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형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共生) 공사(共死)의 맹우 여러분 대륙(大陸)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중국 상해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의 날 침략거두 아리요시(有吉) 일파 도륙을 모의하며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서기 2003년 10월 25일
백정기 의사 상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것은 청일(淸日) 로일(露日) 전쟁에서 피와 재력으로서 야망을 채우게 된 것이니, 우리도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찾으려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반드시 무장을 하고 기다리자.
- 1919년 2월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하며
- 1919년 2월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하며
의거를 위해 대기중 왜경에 의해 피체되는 장면
백정기 의사가 육삼정의거 모사시 폭탄 투척을 자원하는 장면
구파 백정기 의사 유적지 안내도
20. 백정기의사 부인(조필락여사) 묘
21. 백정기의사 고택
20. 백정기의사 부인(조필락여사) 묘
21. 백정기의사 고택
鷗波 白貞基 義士(구파 백정기 의사)
백정기 의사는 부안에서 태어나 12세 되던 1907년 정읍시 영원면 갈선 마을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 후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으로 가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만주 봉천(지금 심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음해 본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여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노동에 종사하며 노동관계서적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부득이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백정기 의사는 중국에서 중국 동지들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1928년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였고, 1930년에는 북만주로 들어가 재북만주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함께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천진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 수송선을 폭파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 무창로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에서 일본정객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일본 장기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 의사의 묘는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의 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의사는 부안에서 태어나 12세 되던 1907년 정읍시 영원면 갈선 마을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 후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으로 가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만주 봉천(지금 심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음해 본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여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노동에 종사하며 노동관계서적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부득이 중국 북경으로 돌아왔다. 백정기 의사는 중국에서 중국 동지들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1928년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였고, 1930년에는 북만주로 들어가 재북만주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함께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천진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 수송선을 폭파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 무창로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에서 일본정객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일본 장기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 의사의 묘는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의 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 / 관리번호 : 51-1-4 / 관리자 : 정읍시장
백정기 의사는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중 한 분으로 1923년 일왕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동경 대지진으로 실패하여 남경 상해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0년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에 폭탄을 던져 대파하고, 1933년 3월 17일 육삼정 요정에 재중일본 공사가 초대한 일군정요인과 중국 친일거두를 전멸시키려다 발각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의 일기로 순국하신 백정기 의사의 뜻을 기리고자 1959년 7월 지역주민들이 영원면 은선리 605-4번지에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여 2003년 1월 현충시설로 지정된 후 같은해 9월 영원면 은선리 724-5번지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으신 백정기 의사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199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2004년 기념관 준공, 고택지 등을 복원.정비하여 현충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백정기 의사는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중 한 분으로 1923년 일왕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동경 대지진으로 실패하여 남경 상해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0년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에 폭탄을 던져 대파하고, 1933년 3월 17일 육삼정 요정에 재중일본 공사가 초대한 일군정요인과 중국 친일거두를 전멸시키려다 발각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의 일기로 순국하신 백정기 의사의 뜻을 기리고자 1959년 7월 지역주민들이 영원면 은선리 605-4번지에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여 2003년 1월 현충시설로 지정된 후 같은해 9월 영원면 은선리 724-5번지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으신 백정기 의사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199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2004년 기념관 준공, 고택지 등을 복원.정비하여 현충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鷗波 白貞基 義士 殉國紀念碑(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
鷗波 白貞基 義士 殉國紀念碑(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
이전 안내
본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는 1956년 도민성금으로 원래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605-4번지인 전방 동남쪽 약150m 지점에 세웠었는데 2003년 의열사 창건과 동시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음
2003년 9월 28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
본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는 1956년 도민성금으로 원래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605-4번지인 전방 동남쪽 약150m 지점에 세웠었는데 2003년 의열사 창건과 동시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음
2003년 9월 28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