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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354-9
- 탐방로그
- 전북 정읍시 시기동 354-9 정읍노휴재를 찾았다. 이곳에 1919년 3.1운동 당시 정읍노휴재 회원 신분으로 활동한 이익겸 (1880~1929), 박환규(1886~1957), 유만규(1887~1953) 3명의 애국지사를 기리는 공적비가 있다고 해서 찾아온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이익겸, 박환규, 유만규 항일운동 공적비
애국지사 이익겸. 본관은 전주이고 보명은 치영이며 일명 재익 응찬의 아들이다. 애국지사 박항규. 본관은 태안이고 자는 경락이며 채현의 아들이다. 지사들은 재원으로서 1919년 기미 3.1운동에 정읍의 지도라로 활약하였다. 3월 15일 태인 3.1운동에 이어 천도교, 기독교인들과 3월 22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시기리 김회근 집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준비하였는데 밀고로 일본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모두 빼앗기고 이익겸과 박항규는 잡혀갔다.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주도자없이 맨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그쳤다. 이익겸과 박항규는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정읍재판소에서 이익겸은 징역 10월, 박항규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군산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박항규는 가혹한 고문으로 다리를 다쳐 평생을 척일사상으로 지냈다. 1990년 이익겸과 박환규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유해는 대전국립묘지에 이장하였다.
애국지사 유만규. 본관은 고흥이고 자는 마삼이며 아호는 운천. 효자 한록의 손이며 연고의 아들이다. 재원으로서 1919년부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유철, 이태훈, 김정술을 거쳐 경성에 나와있던 임시정부요원 조한각에게 1920년까지 3회에 걸쳐 5000원을 전달하였다. 1920년 11월 임시정부는 국내조직으로 전국 13도에 선정사, 군에는 관장이라는 행정기관을 두었는데, 유만규는 흥덕과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4월에는 독립공책사건으로 피체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35년에 사유지 4000평을 희사하여 현 내장초등학교 신설에 공적이 높아 유만규 장학기념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이 항일운동사건으로 정읍노휴재는 일제 관헌의 감시대상이 되어 광복 전까지 운영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애국지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공헌하려는 방안강구에 노심초사하였고, 야학당 운영으로 사회교화 및 민족정기 고취와 자주독립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지대하여 애국애족정신의 귀감으로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재원 일동은 이 공적비를 세운다.
서기 2008년 8월 15일
정읍노휴재 재장 이금종 근찬
애국지사 항일운동 공적비 건립추진위원장 류윤규
애국지사 유만규. 본관은 고흥이고 자는 마삼이며 아호는 운천. 효자 한록의 손이며 연고의 아들이다. 재원으로서 1919년부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유철, 이태훈, 김정술을 거쳐 경성에 나와있던 임시정부요원 조한각에게 1920년까지 3회에 걸쳐 5000원을 전달하였다. 1920년 11월 임시정부는 국내조직으로 전국 13도에 선정사, 군에는 관장이라는 행정기관을 두었는데, 유만규는 흥덕과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4월에는 독립공책사건으로 피체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35년에 사유지 4000평을 희사하여 현 내장초등학교 신설에 공적이 높아 유만규 장학기념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이 항일운동사건으로 정읍노휴재는 일제 관헌의 감시대상이 되어 광복 전까지 운영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애국지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공헌하려는 방안강구에 노심초사하였고, 야학당 운영으로 사회교화 및 민족정기 고취와 자주독립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지대하여 애국애족정신의 귀감으로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재원 일동은 이 공적비를 세운다.
서기 2008년 8월 15일
정읍노휴재 재장 이금종 근찬
애국지사 항일운동 공적비 건립추진위원장 류윤규
전북 정읍시 시기동 354-9 정읍노휴재
이곳에 1919년 3.1운동 당시 정읍노휴재 회원 신분으로 활동한 이익겸 (1880~1929), 박환규(1886~1957), 유만규(1887~1953) 3명의 애국지사를 기리는 공적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