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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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상평동 산134
탐방로그
정읍시 상평동 산 134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 장군 묘를 찾았다. 해당 묘는 빈묘로, 1996년 후손 손홍렬 등이 조성하였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성한이요. 서는 상산 김경선 평산 신현준이라. 손은 홍철 홍렬이라. 여는 호번하여 이를 생략하다. 오호라. 선생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창한 선각자로 그 업적은 청사에 빛나 길이 감명되리라. 손 홍렬보가 나에게 비문을 청하여 불문임을 불고하고 문적과 구비에서 얻은 바 그 대강을 추리어 삼가 엮다. 1997년 정축 2월 일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 회장 최현식 근찬 경주 정명영 근서
정읍시 상평동 산 134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 장군 묘를 찾아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 장군 묘
손화중의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정식, 화중은 자이며, 호는 초산이다. 1861년 6월 22일(음력) 정읍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출생했으며, 처남 유용수와 함께 경상도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교하였다.
손화중은 선운사 도솔암 암벽불상에 있다는 검단대사의 비결록을 꺼냈다는 데서 신비의 인물로 알려져 잇으며,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전주화약 이후 나중의 장성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동년 7월에 있은 나주성 전투에서는 최경선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과 함께 주력부대를 이루었다. 9월 봉기 때에는 일본군이 나주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설이 있어 북상에 참가하지 않고 최경선과 함께 나주에서 대비하였다.
1894년 11월 공주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태인 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 불능에 이르자 11월 27일 광주에 입성한 후 12월 1일에 동학농민군을 해산시켰다. 그 후 몸을 피해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모씨의 제실 있다가 체포당한 뒤, 1895년 3월 29일(양력 4.23) 교수형에 처해져 35세의 나이로 최후를 마쳤는데, 시신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묘는 빈묘로, 1996년 후손 손홍렬 등이 조성하였다.
甲午 摠領 密陽 孫公 華仲 先生 之墓(갑오 총영 밀양 손공 화중 선생 지묘)
선생의 휘는 정식이요, 화중은 자이다. 호를 초산이라 하다. 밀양을 관향으로 신라 문효공 휘 순을 상조로 하여 조선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공신인 휘 승경은 선생의 9대조이다. 누대를 전하여 고조는 휘 연이요, 증조 휘 기일은 효우공검하고 인품이 고매하다. 고 휘 호열의 호는 해은이요, 비 평강 제씨는 홍일의 녀라. 선생은 장남으로 1861년 철종 12년 신유 음 6월 27일 정읍현 과교리에서 태어나니 기골이 헌앙하고 재질이 총명하여 일찍이
경서를 독공하다. 국말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출세를 단념하고 입산 수도하기 위하여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다. 스스로 깨달은 바 있어 동학에 입도하여 이태만에 향리에 돌아와 고창군 성송면 양곡리에 도소를 마련하고 호남의 대접주로 명성을 떨치게 되다. 갑오년에 이르러 전봉준 선생의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혁명론에 뜻을 같이하여 고창군 공음변 구수리에서 많은 포하의 동학농민군을 소집하고 3월 백산 봉기를 지휘하다. 또한 같은 해 9월의 삼례봉기에 선생은 나주에 머물며 후방을 맏아 침략 일본을 무찌르기 위하여 거족적인 항전을 벌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에서 피체되어 1895년 을미 음 3월 30일 서울에서 최후를 마치니 선생의 향년 35세라. 아울러 선생의 제 익중 족질 여옥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여러 종족이 희생되다. 묘는 향리 음성동 서록 석현 임좌에 초혼장하다. 배 고흥류씨는 기린의 여라. 철종 6년 을묘 음 4월 일정읍 현금 북리에서 태어나 규범으로 알려지다. 1911년 임자 음 12월 6일 향년 58세로 졸세하니 선생의 묘에 합폄하다. 자는 병두 성선 성태
경서를 독공하다. 국말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출세를 단념하고 입산 수도하기 위하여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다. 스스로 깨달은 바 있어 동학에 입도하여 이태만에 향리에 돌아와 고창군 성송면 양곡리에 도소를 마련하고 호남의 대접주로 명성을 떨치게 되다. 갑오년에 이르러 전봉준 선생의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혁명론에 뜻을 같이하여 고창군 공음변 구수리에서 많은 포하의 동학농민군을 소집하고 3월 백산 봉기를 지휘하다. 또한 같은 해 9월의 삼례봉기에 선생은 나주에 머물며 후방을 맏아 침략 일본을 무찌르기 위하여 거족적인 항전을 벌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에서 피체되어 1895년 을미 음 3월 30일 서울에서 최후를 마치니 선생의 향년 35세라. 아울러 선생의 제 익중 족질 여옥 처남 류용수와 더불어 여러 종족이 희생되다. 묘는 향리 음성동 서록 석현 임좌에 초혼장하다. 배 고흥류씨는 기린의 여라. 철종 6년 을묘 음 4월 일정읍 현금 북리에서 태어나 규범으로 알려지다. 1911년 임자 음 12월 6일 향년 58세로 졸세하니 선생의 묘에 합폄하다. 자는 병두 성선 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