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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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323-3
탐방로그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426-1에 위치한 충의정을 찾았다. 충의정 내에는 산외면과 깊은 연이 있는 여섯 명의 항일지사에 관한 사적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임혁규(1891~1963)
우리말살리기에 이바지한 인물 자 영화 호 계산 본관 자주 원래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석교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 금사공이 평사리 운전에 터를 잡고 이사하여 이 고장의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했고 널리 덕을 베풀긱에 힘썼으니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흉년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살린 바 있다. 1930년대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우리마을 살려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표준어 제정이 실현되었으며 이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 추진되고 있었다. 그는 이 사업에 동참하여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당국은 1942년 동 사업과 관련해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란것을 꾸며냈다. 그는 이 시건으로 연루되어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잡혀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저들에게 짓밟히고 머리가 깍이는 수모를 당해서 이후 평생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았다 한다.
이동환(1901~1982)
6.10만세사건에 앞장선 인물 호 향산 본관 진주. 본면 평사리 재실에서 세거한 가문에서 태어나 20세에 한학을 배워 칠서를 두루 읽었다. 그리고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로 가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돌아가셨다. 이를 계기로 일어난 것이 6.10만세 사건이다. 당시 그는 5학년 학생으로서 민족주의적 만세 시위를 선도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일제 관헌에 붙잡혀서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하고 지부를 결성 야학등 농민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서는 인재양성에 뜻을 두어 교육계에 투신 전북지역의 여러 종고등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 저술에 힘을 써서 순정년기, 6.10만세 체험록, 금석편람등을 남겼다. 1968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상을 받은바 있다.
정읍시 산외면 평사리 426-1 충의정
민여운(? ~ 1593)
임진왜란때 우리고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죽은 인물 자 종용 본관 여흥 용담현령을 지내고 은퇴해 있던중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원정마을의 저윤근과 손잡고 일어섰다. 향토의 의병 2백여명이 결집 ㄱ그는 대장으로 추대받아 스스로 비의이라 일컷고 출정하였다. 당시 적과 격전이 벌어진 경상동땅으로 들어가서 여러번 싸워 전과를 올렸다. 1593년 6월에는 진주성 사수의 대결전장에 차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손이 끊어지기까지 했으나 끝내 진두지휘를 하다가 적의 총탄에 쓰러져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에서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선무원종훈을 내렸으며 후세에 이조참판의 증직이 내렸다. 묘소는 본면의 용두마을 뒷편 산 기슭에 있다. 그의 종 추동이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아 적을 많이 사살하고 그가 죽음에 함께 전사하였으니 이 또한 특이할 사실이다.
김개남(1853~1894)
동학농민혁명의 선봉장 자 기선 본고간 도강 본명은 영주인데 세상에서 개남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본면 정량리에서 출생 일찍이 지금실로 이사해 살았으며 21세부터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로 활동하였다. 나라가 무너지고 외세에 침탈을 당하는 시대에 처해서 백성을 구하고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큰 뜻을 품고 전봉준과 함께 봉기하였으니 곧 동학농민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태인지역의 농민들을 주축으로 편성된 김개남부대는 남원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총진군을 할적에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군은 공주방면으로 김개남부대는 청주방면으로 올라갔는데 우금치에서 주력군이 무너지고 김개남부대도 결국 처주를 돌파하지 못하고 남하했다. 동학군이 궤멸하게되자 그는 잠적해서 기회를 엿보던중 밀고를 당해 붙잡히고 말았다. 진주형장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1894년 12월 3일이다.
박준승(1866~1927)
삼일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 호 자암 본관 밀양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아래 배치에서 성장했는데 1910년대에 산외면으로 이사하여 이 고장 인물이 되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학고 25세때 동학 2대교주인 최해월의 감화를 받고 입교 수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대열에 참여한 사실이 있다. 동학혁명이 실패한 이후로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에서 계속 활동하여 도사 중앙총부 감사직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919년 주권회복을 위한 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남에 따라 손병희와 함께 거사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이 되었다. 독립선언문을 선포한 직후 일제 관헌에 체포당하여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재판장에서 독립을 해야할 이유가 무었이냐는 재판장의 추궁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독립국민이었다. 독립하지 않고는 안된다고 당당히 주장하였다. 1927년 62세로 별세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김정술(1869~1952)
상해임정을 도운 인물 자는 광국 호는 포석 본관은 도강 본면 오공리 신배에서 태어나 살았던 분이다. 어려서부터 단식으로 항일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 문하에서 유학을 배워 애국애족 정신을 체득했던 바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해서는 최익현이 칠보 무성서원에서 일으킨 의병에 참여할약하였다. 3.1운동직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윤철등과 비밀결사(결사의 명칭은 당시 신문지상에 노동회 혹은 구구단. 대동단으로 보도됨)를 조직 사회운동을 시작한 한편 임정을 후원하기 위한 자금모집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으로 오천원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1921년 12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1990년 항일구국의 대열에서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