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1757-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자동의 탄생
군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연성동과 장곡동, 서쪽으로 능곡동,
북서쪽으로 월곶동, 서쪽으로 정왕동, 남쪽으로 안산시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8.2제곱킬로미터로 시흥시 전체 면적의 6%를 차지한다.
1989년 시흥시 출범 당시 거모동.군자동.월곶동을 관할하는 행정동명은 거모동이었다.
군자동에 있는 군자봉에서 유래된 '군자'라는 지명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
시흥시 출범 전까지 사용되어 왔으므로 동 개청 당시에 동명을 '군자동'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인근 안산시에 이미 군자동이 있어 3개 법정동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던 거모동을 동명으로 정했다.
1994년 1월 1일에 안산시 군자동이 원곡본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자, 1994년 7월 1일 시조례 제 374호에 따라
군자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4년 3월 1일 월곶동이 행정동 군자동에서 분동됨에 따라(시조례 제 1356호)
현재는 법정동 거모동과 군자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연성동과 장곡동, 서쪽으로 능곡동,
북서쪽으로 월곶동, 서쪽으로 정왕동, 남쪽으로 안산시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8.2제곱킬로미터로 시흥시 전체 면적의 6%를 차지한다.
1989년 시흥시 출범 당시 거모동.군자동.월곶동을 관할하는 행정동명은 거모동이었다.
군자동에 있는 군자봉에서 유래된 '군자'라는 지명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
시흥시 출범 전까지 사용되어 왔으므로 동 개청 당시에 동명을 '군자동'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인근 안산시에 이미 군자동이 있어 3개 법정동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던 거모동을 동명으로 정했다.
1994년 1월 1일에 안산시 군자동이 원곡본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자, 1994년 7월 1일 시조례 제 374호에 따라
군자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4년 3월 1일 월곶동이 행정동 군자동에서 분동됨에 따라(시조례 제 1356호)
현재는 법정동 거모동과 군자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9년 3.1운동
□ 3.1만세운동 외부조직이나 힘에 기대지 않고 지역민들이 자발적인 합심으로 이뤄낸 특징을 가진 독립운동.
□ 매년 3.1운동 기념 행사가 군자동 군자초에서 열린다.
□ 3.1만세운동 외부조직이나 힘에 기대지 않고 지역민들이 자발적인 합심으로 이뤄낸 특징을 가진 독립운동.
□ 매년 3.1운동 기념 행사가 군자동 군자초에서 열린다.
1920년대 군자염전
□ 일제강점기인 1920년~1930년대 군자염전 개발
□ 염전의 소금판매는 서민 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 일제강점기인 1920년~1930년대 군자염전 개발
□ 염전의 소금판매는 서민 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경기 시흥시 거모동 1757-6 군자파출소 앞 거모리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안내판, 동판을 찾았다.
거모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去毛里 警察 駐在所 3.1運動 萬歲 示威址) 안내판
거모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去毛里 警察 駐在所 3.1運動 萬歲 示威址) - 경기도 시흥시 군자로 513
거모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강은식 등의 주도로 시흥군 군자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 경찰관 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순사 6명과 군인 7명이 영등포에서 거모리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1919년 4월 4일 오전 11시 무렵에 경찰 주재소 부근에는 약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강은식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거모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강은식 등의 주도로 시흥군 군자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 경찰관 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순사 6명과 군인 7명이 영등포에서 거모리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1919년 4월 4일 오전 11시 무렵에 경찰 주재소 부근에는 약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강은식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군자동 역사의 오름길 - 군자동, 역사적 전통과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