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산12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해학 이기 선생은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전봉준에게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1906년에는 장지연, 박은식 등과 함게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2월 을사오적신을 처단하고자 나인영, 오기호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시도하엿으나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히고 피체되고 말았다.
1907년 유배형(7년)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에 귀양갔다 풀려난 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는 이를 기리기 위해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건립위원회가 1983년 8월 1일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10월 14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해학 이기 선생은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전봉준에게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1906년에는 장지연, 박은식 등과 함게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2월 을사오적신을 처단하고자 나인영, 오기호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시도하엿으나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히고 피체되고 말았다.
1907년 유배형(7년)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에 귀양갔다 풀려난 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는 이를 기리기 위해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건립위원회가 1983년 8월 1일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5년 10월 14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海鶴 李沂 先生 救國運動 追念碑(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여기 나라와 겨레 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이기 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 호는 해학, 본이 고성으로 1848년 전북 만정에서 나시었다. 일찌기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을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 8제의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국토의 측량과 세정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시었다.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와 자신회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다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올리는 한편 을사오적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리셔서도 호남학보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 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북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에서 단식절사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돼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레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후학 문학박사 전상기 근찬 여산 송성용 근서
여기 나라와 겨레 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이기 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 호는 해학, 본이 고성으로 1848년 전북 만정에서 나시었다. 일찌기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을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 8제의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국토의 측량과 세정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시었다.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와 자신회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다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올리는 한편 을사오적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리셔서도 호남학보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 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북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에서 단식절사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돼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레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후학 문학박사 전상기 근찬 여산 송성용 근서
海鶴 李沂 先生 救國運動 追念碑(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여기 나라와 겨레 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이기 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 호는 해학, 본이 고성으로 1848년 전북 만정에서 나시었다. 일찌기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을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 8제의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국토의 측량과 세정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시었다.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와 자신회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다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올리는 한편 을사오적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리셔서도 호남학보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 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북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에서 단식절사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돼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레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후학 문학박사 전상기 근찬 여산 송성용 근서
여기 나라와 겨레 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이기 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 호는 해학, 본이 고성으로 1848년 전북 만정에서 나시었다. 일찌기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을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 8제의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국토의 측량과 세정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시었다.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와 자신회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다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올리는 한편 을사오적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리셔서도 호남학보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 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북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에서 단식절사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돼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레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후학 문학박사 전상기 근찬 여산 송성용 근서
三育教育論(삼육교육론) - 해학 이기. 어렸을 대 학문은 반드시 三育(삼육)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삼육의 방법은 우리 고전에 실려있지도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인지 의심할 것입니다. 이른바 고전이란 것은 구경(九經)이나 제자의 서 좌씨전 국어 등 중국의 여러 서적으로서 옛날 대학의 교과서였읍니다. 그밖에 태한 이후는 전제적 비리의 서적들입니다. 주자가 소학이란 책을 엮어내어 8,9세의 아이들에게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소제까지 하라는 말을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린이들을 시체처럼 꼿꼿하게 몇시간이고 앉으라 하면 혈기부터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고금의 물정 다르고 우리 한국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데 저 소학의 교육으로써 무슨 보람을 거둘 수 있겠읍니까. 이제 삼육법을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體育(체육)으로 이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등의 교육입니다. 한창 자랄 8,9세의 어린이를 종일 유폐된 방안에 꿇어 앉혀 글만 읽게 하면 아이들이 우울해지고 정서가 해이되는 타성이 생기게 됩니다. 비유컨대 담밑에서 태양을 받지 못한 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어항에서 자라는 고기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는 아이는 하루에 한때라도 반드시 자기의 손발에 힘을 드려 근육과 골격을 강장하게 하고 그 지기를 펼쳐, 혈맥을 유통케하여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것이니 이것을 체조라고 합니다. 체조는 사람의 몸을 건전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둘째는 德育(덕육)으로 여러 교육중에서 효 등의 윤리적 교육입니다. 우리 유가의 도법이 여러 교육중에서 가장 나은 점은 오로지 이 덕육임에도 그 에절과 의식이 너무 번거로워서 실천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물며 어린이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도덕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읍니까. 근래 학계의 여러 교육자들이 엮은 소학과목의 교과서가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 할지라도 모두 읽을만한 것들이니 교사된 자들은 반드시 君 父 家 國에 대한 도의를 조석으로 말하여 귀에 익히고 마음에 적시면 무자를 알 뿐만 아니라 덕육의 효과도 얻을 것 입니다.
셋째는 智育(지육)으로 이는 모든 사물의 이름과 수에 대한 교육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물질로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것이면 모두 알아야 합니다. 집에는 미곡 포백 가옥 그릇이 있고 나라에는 조정 관부 산천 군읍이 있고 인간사회에는 씨족 및 세가 이웃 친척이 있고 물건에도 조목 충어 금은 광산물이 있으니 이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헤아리는 지식은 모두 우리들 생활의 급선무입니다.
1900년 지은 「一斧劈破論(일부벽파론)」에서 송하경 근서
첫째는 體育(체육)으로 이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등의 교육입니다. 한창 자랄 8,9세의 어린이를 종일 유폐된 방안에 꿇어 앉혀 글만 읽게 하면 아이들이 우울해지고 정서가 해이되는 타성이 생기게 됩니다. 비유컨대 담밑에서 태양을 받지 못한 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어항에서 자라는 고기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는 아이는 하루에 한때라도 반드시 자기의 손발에 힘을 드려 근육과 골격을 강장하게 하고 그 지기를 펼쳐, 혈맥을 유통케하여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것이니 이것을 체조라고 합니다. 체조는 사람의 몸을 건전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둘째는 德育(덕육)으로 여러 교육중에서 효 등의 윤리적 교육입니다. 우리 유가의 도법이 여러 교육중에서 가장 나은 점은 오로지 이 덕육임에도 그 에절과 의식이 너무 번거로워서 실천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물며 어린이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도덕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읍니까. 근래 학계의 여러 교육자들이 엮은 소학과목의 교과서가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 할지라도 모두 읽을만한 것들이니 교사된 자들은 반드시 君 父 家 國에 대한 도의를 조석으로 말하여 귀에 익히고 마음에 적시면 무자를 알 뿐만 아니라 덕육의 효과도 얻을 것 입니다.
셋째는 智育(지육)으로 이는 모든 사물의 이름과 수에 대한 교육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물질로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것이면 모두 알아야 합니다. 집에는 미곡 포백 가옥 그릇이 있고 나라에는 조정 관부 산천 군읍이 있고 인간사회에는 씨족 및 세가 이웃 친척이 있고 물건에도 조목 충어 금은 광산물이 있으니 이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헤아리는 지식은 모두 우리들 생활의 급선무입니다.
1900년 지은 「一斧劈破論(일부벽파론)」에서 송하경 근서
三育教育論(삼육교육론) - 해학 이기. 어렸을 대 학문은 반드시 三育(삼육)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삼육의 방법은 우리 고전에 실려있지도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인지 의심할 것입니다. 이른바 고전이란 것은 구경(九經)이나 제자의 서 좌씨전 국어 등 중국의 여러 서적으로서 옛날 대학의 교과서였읍니다. 그밖에 태한 이후는 전제적 비리의 서적들입니다. 주자가 소학이란 책을 엮어내어 8,9세의 아이들에게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소제까지 하라는 말을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린이들을 시체처럼 꼿꼿하게 몇시간이고 앉으라 하면 혈기부터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고금의 물정 다르고 우리 한국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데 저 소학의 교육으로써 무슨 보람을 거둘 수 있겠읍니까. 이제 삼육법을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體育(체육)으로 이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등의 교육입니다. 한창 자랄 8,9세의 어린이를 종일 유폐된 방안에 꿇어 앉혀 글만 읽게 하면 아이들이 우울해지고 정서가 해이되는 타성이 생기게 됩니다. 비유컨대 담밑에서 태양을 받지 못한 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어항에서 자라는 고기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는 아이는 하루에 한때라도 반드시 자기의 손발에 힘을 드려 근육과 골격을 강장하게 하고 그 지기를 펼쳐, 혈맥을 유통케하여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것이니 이것을 체조라고 합니다. 체조는 사람의 몸을 건전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둘째는 德育(덕육)으로 여러 교육중에서 효 등의 윤리적 교육입니다. 우리 유가의 도법이 여러 교육중에서 가장 나은 점은 오로지 이 덕육임에도 그 에절과 의식이 너무 번거로워서 실천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물며 어린이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도덕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읍니까. 근래 학계의 여러 교육자들이 엮은 소학과목의 교과서가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 할지라도 모두 읽을만한 것들이니 교사된 자들은 반드시 君 父 家 國에 대한 도의를 조석으로 말하여 귀에 익히고 마음에 적시면 무자를 알 뿐만 아니라 덕육의 효과도 얻을 것 입니다.
셋째는 智育(지육)으로 이는 모든 사물의 이름과 수에 대한 교육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물질로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것이면 모두 알아야 합니다. 집에는 미곡 포백 가옥 그릇이 있고 나라에는 조정 관부 산천 군읍이 있고 인간사회에는 씨족 및 세가 이웃 친척이 있고 물건에도 조목 충어 금은 광산물이 있으니 이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헤아리는 지식은 모두 우리들 생활의 급선무입니다.
1900년 지은 「一斧劈破論(일부벽파론)」에서 송하경 근서
첫째는 體育(체육)으로 이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등의 교육입니다. 한창 자랄 8,9세의 어린이를 종일 유폐된 방안에 꿇어 앉혀 글만 읽게 하면 아이들이 우울해지고 정서가 해이되는 타성이 생기게 됩니다. 비유컨대 담밑에서 태양을 받지 못한 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어항에서 자라는 고기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는 아이는 하루에 한때라도 반드시 자기의 손발에 힘을 드려 근육과 골격을 강장하게 하고 그 지기를 펼쳐, 혈맥을 유통케하여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것이니 이것을 체조라고 합니다. 체조는 사람의 몸을 건전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둘째는 德育(덕육)으로 여러 교육중에서 효 등의 윤리적 교육입니다. 우리 유가의 도법이 여러 교육중에서 가장 나은 점은 오로지 이 덕육임에도 그 에절과 의식이 너무 번거로워서 실천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물며 어린이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도덕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읍니까. 근래 학계의 여러 교육자들이 엮은 소학과목의 교과서가 비록 완전치는 못하다 할지라도 모두 읽을만한 것들이니 교사된 자들은 반드시 君 父 家 國에 대한 도의를 조석으로 말하여 귀에 익히고 마음에 적시면 무자를 알 뿐만 아니라 덕육의 효과도 얻을 것 입니다.
셋째는 智育(지육)으로 이는 모든 사물의 이름과 수에 대한 교육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물질로 생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것이면 모두 알아야 합니다. 집에는 미곡 포백 가옥 그릇이 있고 나라에는 조정 관부 산천 군읍이 있고 인간사회에는 씨족 및 세가 이웃 친척이 있고 물건에도 조목 충어 금은 광산물이 있으니 이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헤아리는 지식은 모두 우리들 생활의 급선무입니다.
1900년 지은 「一斧劈破論(일부벽파론)」에서 송하경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