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123-1
- 탐방로그
- 전주 서문교회에서 부임하여 활동했던 김인전 목사의 기념비이다. 같은 교회에서 시무한 배은희 목사의 기념비가 인근에 함께 있다. 한편 서문교회 내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이 남아 있으며 직경 1m가 된다. 이 커다란 종탑은 1908년에 세워져 1944년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되었으나, 해방 후 다시 제작되었다. 서문교회는 1893년에 세워진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자 전주 3·13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길 건너편 다가공원에 있었던 김인전 목사 기념비와 배은희 목사 기념비가 같이 옮겨져 있었다.
김인전 목사 기념비
관리번호 : 52-1-32
관리자 : 전주서문교회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220(다가동 3가 123)
김인전 목사는 충남 서산군 한산 출신으로 1914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내의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인 1914-1919년에 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김인전 목사는 본 교회 재임 중 성경학원 교수와 전북노회장을 역임하면서 선교와 교회 부흥에 노력하였고, 그를 따르는 기전, 신흥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기독교 진리와 더불어 민족주의, 애국사상, 국제정세를 가르쳤다. 또한 그는 1919년에 전주 3·1만세운동을 총 지휘하며 독립선언문, 태극기 등을 인쇄 반포하였는데, 일본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정원 일원으로서 재무예산위원, 정무조사특별위원, 전원위원장부의장, 국무원학장 총무대리, 의정원의장(제4대)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김인전 목사의 현저한 공적이 확인되어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본 기념비는 전주서문교회에서 김인전 목사와 함께 1921-1936년까지 시무한 배은희 목사(경북 경산 출생, 전주 최초 유치원 설립, 무산아동성경학교, 야학회 등 설립, 신간회 전주지부장,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장, 미소공동회의 반대 민족대표 의장, 대한민국정부의 초대고시 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가 지역사회에 끼친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86년 4월 29일 다가공원 입구에 김인전/배은희 목사 기념비를 설립하였으나, 2015년 12월 22일 체계적인 시설관리와 우리나라에 남긴 유덕을 기념하고자 하는 설립 취지를 보전하기 위해 전북동부보훈지청, 전주시청, 전주서문교회가 합의에 의하여 이곳에 이전하였다.
관리번호 : 52-1-32
관리자 : 전주서문교회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220(다가동 3가 123)
김인전 목사는 충남 서산군 한산 출신으로 1914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내의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인 1914-1919년에 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김인전 목사는 본 교회 재임 중 성경학원 교수와 전북노회장을 역임하면서 선교와 교회 부흥에 노력하였고, 그를 따르는 기전, 신흥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기독교 진리와 더불어 민족주의, 애국사상, 국제정세를 가르쳤다. 또한 그는 1919년에 전주 3·1만세운동을 총 지휘하며 독립선언문, 태극기 등을 인쇄 반포하였는데, 일본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정원 일원으로서 재무예산위원, 정무조사특별위원, 전원위원장부의장, 국무원학장 총무대리, 의정원의장(제4대)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김인전 목사의 현저한 공적이 확인되어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본 기념비는 전주서문교회에서 김인전 목사와 함께 1921-1936년까지 시무한 배은희 목사(경북 경산 출생, 전주 최초 유치원 설립, 무산아동성경학교, 야학회 등 설립, 신간회 전주지부장,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장, 미소공동회의 반대 민족대표 의장, 대한민국정부의 초대고시 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가 지역사회에 끼친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86년 4월 29일 다가공원 입구에 김인전/배은희 목사 기념비를 설립하였으나, 2015년 12월 22일 체계적인 시설관리와 우리나라에 남긴 유덕을 기념하고자 하는 설립 취지를 보전하기 위해 전북동부보훈지청, 전주시청, 전주서문교회가 합의에 의하여 이곳에 이전하였다.
金仁全 牧師 記念碑(김인전 목사 기념비)
김인전 목사는 1876년 충남 서천군 한산에서 휘 규배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관향은 김해요 당호는 경재라 하다. 조부 휘 태현은 현감 부친은 군수를 역임하였으니 고연의 가문에서 자라나다. 일찌기 구학문을 익히고 부친의 신앙을 좇아 기독교에 입교하다. 일제에 국권을 빼았기게 되자 민족계몽에 뜻을 품고 1911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영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길러내다. 오직 구국의 길은 신앙이라는 일념으로 1914년 39세의 만학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세를 펼치다. 덕성과 해박한 지식으로 교화에 힘쓰니 교인들은 물론 신흥 기전학교 교사들을 위시하여 기인 김보한 선생 등 만은 전주 인사들이 경모하고 그의 뜻을 따르다. 3.1운동이 일어나니 목사는 전주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시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이승만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조국광복에 앞장서다. 1920년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 의원으로 피선되어 전북을 대표하고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공채관리국장 학무총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태평양회의 외무후원회와 노병회를 조직하는데 주역을 맡았고 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임정에 크게 이바지 하다. 1923년 우연히 병을 얻어 상해 일우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니 향년 47세라. 유해는 상해 송경령 능원에 묻혀 계시다. 독립기념관에는 목사의 입상이 세워질 계획이 있고 이에 동지들이 뜻을 받들어 기념하고자 한다.
1986년 4월 29일 서은선 짓고 권갑석 쓰다.
김인전 목사는 1876년 충남 서천군 한산에서 휘 규배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관향은 김해요 당호는 경재라 하다. 조부 휘 태현은 현감 부친은 군수를 역임하였으니 고연의 가문에서 자라나다. 일찌기 구학문을 익히고 부친의 신앙을 좇아 기독교에 입교하다. 일제에 국권을 빼았기게 되자 민족계몽에 뜻을 품고 1911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영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길러내다. 오직 구국의 길은 신앙이라는 일념으로 1914년 39세의 만학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세를 펼치다. 덕성과 해박한 지식으로 교화에 힘쓰니 교인들은 물론 신흥 기전학교 교사들을 위시하여 기인 김보한 선생 등 만은 전주 인사들이 경모하고 그의 뜻을 따르다. 3.1운동이 일어나니 목사는 전주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시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이승만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조국광복에 앞장서다. 1920년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 의원으로 피선되어 전북을 대표하고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공채관리국장 학무총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태평양회의 외무후원회와 노병회를 조직하는데 주역을 맡았고 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임정에 크게 이바지 하다. 1923년 우연히 병을 얻어 상해 일우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니 향년 47세라. 유해는 상해 송경령 능원에 묻혀 계시다. 독립기념관에는 목사의 입상이 세워질 계획이 있고 이에 동지들이 뜻을 받들어 기념하고자 한다.
1986년 4월 29일 서은선 짓고 권갑석 쓰다.
김인전 목사는 1876년 충남 서천군 한산에서 휘 규배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관향은 김해요 당호는 경재라 하다. 조부 휘 태현은 현감 부친은 군수를 역임하였으니 고연의 가문에서 자라나다. 일찌기 구학문을 익히고 부친의 신앙을 좇아 기독교에 입교하다. 일제에 국권을 빼았기게 되자 민족계몽에 뜻을 품고 1911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영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길러내다. 오직 구국의 길은 신앙이라는 일념으로 1914년 39세의 만학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세를 펼치다. 덕성과 해박한 지식으로 교화에 힘쓰니 교인들은 물론 신흥 기전학교 교사들을 위시하여 기인 김보한 선생 등 만은 전주 인사들이 경모하고 그의 뜻을 따르다. 3.1운동이 일어나니 목사는 전주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시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이승만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조국광복에 앞장서다. 1920년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 의원으로 피선되어 전북을 대표하고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공채관리국장 학무총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태평양회의 외무후원회와 노병회를 조직하는데 주역을 맡았고 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임정에 크게 이바지 하다. 1923년 우연히 병을 얻어 상해 일우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니 향년 47세라. 유해는 상해 송경령 능원에 묻혀 계시다. 독립기념관에는 목사의 입상이 세워질 계획이 있고 이에 동지들이 뜻을 받들어 기념하고자 한다. - 1986년 4월 29일 서은선 짓고 권갑석 쓰다.
김인전 목사 배은희 목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고문 강희남 목사 김영진 목사 서은선 목사 최상봉 목사 염용택 목사 오기준 목사 이근상 장노
위원장 조영진 장노
부위원장 오준기 장노
총무 김심원 선생
위원 강정문 장노 고귀한 목사 김갑태 목사 김대선 목사 김대전 장노 김동진 목사 김용칠 목사 김정두 장노 김준성 장노 김태수 목사 박석진 목사 백윤석 목사 양교철 목사 양희천 장노 오병식 목사 이동휘 목사 이천수 목사 이선근 목사 임규순 장노 임종현 장노 전경선 목사 전호경 선생 한용덕 장노 (가나다순)
고문 강희남 목사 김영진 목사 서은선 목사 최상봉 목사 염용택 목사 오기준 목사 이근상 장노
위원장 조영진 장노
부위원장 오준기 장노
총무 김심원 선생
위원 강정문 장노 고귀한 목사 김갑태 목사 김대선 목사 김대전 장노 김동진 목사 김용칠 목사 김정두 장노 김준성 장노 김태수 목사 박석진 목사 백윤석 목사 양교철 목사 양희천 장노 오병식 목사 이동휘 목사 이천수 목사 이선근 목사 임규순 장노 임종현 장노 전경선 목사 전호경 선생 한용덕 장노 (가나다순)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123-1 전주서문교회 내 김인전 목사 기념비를 찾았다.
종각 연혁
1892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일행 7인이 1893년 전주에 정착하여 교회를 설립하니 호남지역의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 일행 중 본 교회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였던 전위렴(W.M.Junkin) 목사가 1908년 1월 2일 43세로 이 고장에서 별세하니 그의 부인 마리 리번(Mary Leyburn) 여사가 남편의 선교 기념으로 교회당 종을 미국으로 주문 구입하여 교회에 헌납하였다. 교회에서는 그해 10월 26일 제직회에서 종각 건립을 결의하고 그 경비를 본 교회와 각 지교회의 연보로 충당하여 그 해(1908년) 12월 중순에 공사를 끝냈다. 당시 그 종은 직경이 약 90cm였으며 이 고장에서 처음 보는 서양식 큰 종으로서 맑은 소리가 인근 20여리에 펼쳐 울렸다. 1942년 일제 말기 전쟁 무기 제조를 위해 일본경찰이 이 종마저 빼앗아가니 그 모습과 그 소리를 잃게 되엇다. 1945년 민족해방 후 국내에서 제작된 종을 구입하여 허전했던 그 자리를 메꾸어 달아놓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높이 6m 80cm인 본 종각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예배당 정문 계단자리이었으나 그후 수 차례 옮겨서 현 위치에 서있게 되었으며 본 종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종각으로 사료된다.
1892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일행 7인이 1893년 전주에 정착하여 교회를 설립하니 호남지역의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 일행 중 본 교회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였던 전위렴(W.M.Junkin) 목사가 1908년 1월 2일 43세로 이 고장에서 별세하니 그의 부인 마리 리번(Mary Leyburn) 여사가 남편의 선교 기념으로 교회당 종을 미국으로 주문 구입하여 교회에 헌납하였다. 교회에서는 그해 10월 26일 제직회에서 종각 건립을 결의하고 그 경비를 본 교회와 각 지교회의 연보로 충당하여 그 해(1908년) 12월 중순에 공사를 끝냈다. 당시 그 종은 직경이 약 90cm였으며 이 고장에서 처음 보는 서양식 큰 종으로서 맑은 소리가 인근 20여리에 펼쳐 울렸다. 1942년 일제 말기 전쟁 무기 제조를 위해 일본경찰이 이 종마저 빼앗아가니 그 모습과 그 소리를 잃게 되엇다. 1945년 민족해방 후 국내에서 제작된 종을 구입하여 허전했던 그 자리를 메꾸어 달아놓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높이 6m 80cm인 본 종각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예배당 정문 계단자리이었으나 그후 수 차례 옮겨서 현 위치에 서있게 되었으며 본 종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종각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