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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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314-4
탐방로그
평생을 올곧은 법조인으로 지낸 전북출신 법조삼성(法曹三聖)의 동상은 1998년 12월3일 전주시 덕진 공원에 건립되었다.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 전주지검 서울고검장을 지낸 화강 최대교 선생, 전부지법, 서울고법 원장이신 바오로 김홍섭판사이다. 세분은 모두가 한결같이 강직·청렴한 법조인으로 손꼽히는 분들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흠모의 뜻을 모아 여기 형상을 세움은 그 이름 대대로 기억하고자 함이여.
저 소백산맥을 등뼈로 모악을 일으킨 땅 전북은 만경강을 가슴의 띠로 삼고, 북으로 금강 남으로 노령을 들러 드 넓은 옥토 곡창을 펼텼으니 이 복된 고장에서 낳은 한국 법조계 거룩한 세 어른으로 하여금 길이 영예로움이여, 무릇 근현대 사법 일백년과 더불어 오로지 법을 정의로 삼고 법을 사랑과 양심으로 한껏 꽃피웠으니 나라 안팎의 전설이 되어 두고 두고 이어짐이여.
가인 김병로선생은 젊은 날 호남 유학의 거장 간재 문하에서 배웠고, 의병장 면암 휘하에서 싸운 뒤, 마침내 법조인으로 나신 이래 삼일운동사건, 육심만세사건, 형평사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 여운형사건등 수 많은 독립운동 관련의 사건들을 도 맡아 법정투쟁의 나날을 보낸지라 건국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여 한사코 법이 권력에 굴복하는것을 막아 온 그 송죽같은 기상이여.
그 뒤를 위어 화강 최대교선생은 건국 초기의 검찰관으로서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바 부정에 연루된 장관을 기소하고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양심선을 나기는 등 그의 강직한 검찰권의 의지로 일제의 정치공작에 대하여 벙의 정도를 기켜 걸었으니 한편으로 약자가 희생되지 않도록 법 진행을 도?? 바탕 삼아온 산 귀감이여.
바오로 김홍섭선생의 법관일생은 한 마디로 영혼과 법의 일치를 구현한 사도행전의 생애 그것이거니와 한국 법조계의 태양이니 사형수의 대부니 하는 평판과 함께 극도의 청렴으로 일관함은 그가 남겨놓은 헌 고무신 한 켤레와 법복이며 한 오리 티끌도 묻을 수 없었으니 그토록 고결함이여.
이로써 세 어른으로 만년의 고향 전북은 법조인의 성지로 칭송되니 내일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살아날 향기로움이여.
바오로 김홍섭 선생
가인 김병로 선생

전북 출신 3분의 법조인을 기리는 3분의 동상(좌상)

이 동상은 전북 출신의 훌륭한 법조인 3인의 삶을 기려 1999년 11월 건립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고 부른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전북 순창),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전북 김제)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전북 익산) 전 서울고검장이다.

가인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을 한 공로로 법조인으로는 드물게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귀의한 김 판사는 재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철학으로 실천한 분으로 유명하다.
화강 최대교 선생
전북 출신 3분의 법조인을 기리는 3분의 동상(좌상)

이 동상은 전북 출신의 훌륭한 법조인 3인의 삶을 기려 1999년 11월 건립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고 부른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전북 순창),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전북 김제)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전북 익산) 전 서울고검장이다.
가인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을 한 공로로 법조인으로는 드물게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귀의한 김 판사는 재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철학으로 실천한 분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한 사람, 최대교(1901~1992) 고검장. 그는 우리 검찰사에서 ‘대쪽검사’의 상징으로 불리는 분이다.
청백리의 요람이요, 법조인의 성지
오래 전부터 우리 고장 전북은 "청백리의 요람이요, 법조인의 성지"라고 불리어져 왔다. 우리나라 근대사법이 일백년의 역사의 탑을 쌓아오는 동안 법의 정의로 터를 닦고, 사법의 양식으로 기틀을 세운 이 나라 대표적인 법조인 세분이 모두 우리 전북에서 태어나신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 세 어른은 한국 법조의 대부로 너무도 유명한 가인 김병로선생을 비롯하여 검찰의 양심 화강 최대교선생, 그리고 법복입은 성직자 바오로 김홍섭선생이시다. 고매하신 인격, 대쪽같은 성품, 하늘을 찌를듯한 기개, 청렴했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가지도 모자람이 없는 법조인의 사표였고, 이 나라 법조계의 표상들이시다. 그리하여 이 세어른을 "한국 법조계의 3성"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고장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나신 가인 김병로선생은 젊은 시절 항일의병으로 참전도 했으며, 나라를 되찾아 건국 후 초대 대법원장이 되셔서는 "법관은 비록 굶어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정을 해서는 안된다"고 산하 각급 사법종사자들에게 강조하는 한편, 당시의 독재 정권에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서 그대로 민주사법의 주춧돌이 되신 어른이시다.
또 익산의 감기면 출신인 화강 최대교선생은 건국후 혼란이 자김했던 시절, 전주지검, 서울지검의 검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이 나라 검찰의 양심이었고 기개였다. 독재자의 압력에도 굴함이 없이 부패한 고관들을 기소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겨 오늘날에도 대쪽같은 검사이며, 또 검찰의 용기요, 귀감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김제의 금산면에서 생을 얻은 바오로 김홍섭선생은 전주지검, 광주고법, 서울고법등의 법원장을 거치면서도 청빈하게 살아오신 분으로 유명하시다. 유달리 깊었던 신앙심에 바탕한 그의 일생은 법관이기 전에 차라리 성직자였으며, 그 같은 삶으로 인하여 우리 나라 법조계에서는 "사형수의 대부"라고 불리우며, 오늘날에도 길이 추앙을 받고있다.
한 고장에서 한 분의 존경스러운 인물을 탄생시키기도 어려운 일이거늘, 우리나라 법조계의 스스이 되신 세 법조인 모두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신 일은 결코 예사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세 어른은 그대로 "우리 고장 전북의 자존심이요, 긍지이며, 우리의 영원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이 세 어른의 챙백하고 고귀한 삶과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여 그 정신을 기리고, 또 후대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고자 전주에 동상을 세워, 우리 고장을 한국 법조의 성지로 가꾸고자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