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두 기적비

4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314-4
탐방로그
추산 김일두 선생 기적비는 최영희 장군 공덕비 바로 옆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추산 김일두 의사의 관향은 김해로 무오사화때 절의로 알려진 탁영 김일손선생의 혈통을 이어 김창진옹의 장남으로 1891년 순창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1955년 65세를 일기로 전주에서 서거하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독립유공자로 표창하다.
일두는 그의 이름이요 자는 동수며 아호는 추산이다.
항일운동때쓴 가명으로 진동 또는 동으로 불리기도 하다.
일찌기 경서에 통달하고 늠름한 기상과 헌헌한 체구는 가히 장재로 촉망되다. 을미협약에 격분한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항일구국에 뜻을 품고 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원주진위대장 민긍호막하 의병에 가담하여 소대장으로써 항일투쟁에서 전과를 거두다.
경술치욕을 당하자 반항회를 조직한후 전국의 일본경찰서를 폭파하려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서 구국정신을 고취하다.
조종국, 최전구, 백정기등과 대한유생독립단을 결성하여 단장에 추대되
항일투쟁에 크게 전공을 세우다. 한때 국내에 잠입하여 조종국, 곽한일 등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일경의 추적을 받고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북경에서 영위대학 의학부에 재적 중 이시영, 조성환, 신채호 등과 결의하고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자금 조달과 조직책을 맡다. 대학을 족업한 후에는 노령의 신한촌의 고평장군막하에서 독립군 중장으로 활약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다. 다시 만주로 돌아와 약국을 경영하면서 군자금 조달을 획책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서간도에서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자 신흥무관학교에서 병학을 강의하고 김진동이란 가명으로 김환과 더불어 국내에 잠입하여 통신및 동지규합과 군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활약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을 복역하는 동안 일본 총독의 순시를 계기로 옥중투쟁을 벌려 심한 고문을 받고 5년의 옥고를 치른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다. 김동이라는 가명으로 재차 전북에 잠입하여 김재석의 비호를 입어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일경에 체포도어 3년을 복무하다 출옥 후에는 전주 효자동 셋방살이에서 악형의 여독으로 신체의 장애를 이르키어 신고하던 중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나 끝나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여 독자인 용석은 승려생활로 은둔하다 미일전쟁말기에 업어들자 일제의 발악으로 지리산에 잠적하여 동지들의 유족을 끌어들여 신변을 보호하다 조국해방을 맞이하여 전주 구제로 돌아오다. 한때 김구주석과 건국운동 및 남북통일정부수립에 진력하였으나 주석이 불한의 흉탄으로 서거하자 분단된 조국을 개탄하다가 세상을 뜨다. 의사의 열열한 우국충렬은 민족천추의 귀감으로서 우리 고장의 자랑이다. 이에 비를 세워 빛나는 공적을 길이 받들고저한다.
1907년 민긍호 의진에 참여한 이래 만주 및 상해에서 의열투쟁, 군자금 모집 등에 노력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추산 김일두 선생의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