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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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314-4
탐방로그
김개남장군은 동학군 지도자로,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의 삼걸로 일컫고, 김개남 장군은 적극적인 강경파였다고 한다.
덕진공원에 전봉준 장군상, 손화중 장군 추모비 곁에 함께 세워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우리 민족은 민중이 주인이 되고자하는 자랑스런 항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 위에 우뚝 선 동학농민전쟁이 그렇고 그 지도자로 살다간 김개남장군이 그렇다. 4186년 전라도 태인땅 지금실에서 김씨댁 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개남 장군은 불꽃같은 의지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동학농민전쟁의 지돠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해 민족의 앞날을 걱정을 하고 있던 김개남장군은 봉건왕조의 부패와 수탈로 민심이 흉흉하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탈로 나라가 위태롭자 4227년 3월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국가의 안위를 좌시할 수 없어 억조창생의 뜻을 모아 의기를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하는 격문을 띄우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동한농민군은 황톳재와 황룡강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갈재넘어 원평 금구를 거쳐 4월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어 전주화약을 맺은뒤 김개남장군은 남원성을 중심으로 김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평정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영주란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9월 2차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패하여 통한의 눈물을 삼키면서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혀 12월 전주성 서교장에서 목이 잘려 효시됬다. 그 나이 42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따라서 무덤도 없다. 구천에 떠도는 그 고혼은 어디서 통곡을 하고 있는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지 어언 아흔아홉해 그의 뜻을 기리고 맺힌 한을 풀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돌을 세우니 진흙속에 핀 저 연꽃이 더욱 아릅답듯이 그의 넋은 역사를 비추는 횃불로 되살아날 것이며 찬란한 태양으로 이땅에 더욱 빛나리라.
4326년 5월 3일 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
김개남장군 추모비
김개남장군은 동학군 지도자로, 전봉준, 존화중과 아울러 갑오동학혁명의 삼걸로 일컫고, 김개남장군은 적극적인 강경파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 이 땅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은 봉건체제의 모순과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혁명운동이었으니 이로써 민족자존의 깃발이 우뚝 세워졌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의 자랑스런 역사와 그 한가운데서 민중해방의 일념으로 타올랐던 김개남장군과 아울러 역사앞에 이름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의 뜻을 오늘에 되살려 그들의 뜻이 살아 숨쉬는 이 땅에 동학농민전쟁 정신을 길이 길이 빛내고자 강희남이 짓고 신영복이 써 역사의 돌을 세운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 이 땅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은 봉건체제의 모순과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혁명운동이었으니 이로써 민족자존의 깃발이 우뚝 세워졌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의 자랑스런 역사와 그 한가운데서 민중해방의 일념으로 타올랐던 김개남장군과 아울러 역사앞에 이름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의 뜻을 오늘에 되살려 그들의 뜻이 살아 숨쉬는 이 땅에 동학농민전쟁 정신을 길이 길이 빛내고자 강희남이 짓고 신영복이 써 역사의 돌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