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대성리 97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 박정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1998.4월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본 추념비를 2010년 2월 12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 박정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1998.4월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본 추념비를 2010년 2월 12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 박정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1998.4월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본 추념비를 2010년 2월 12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안성섭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 박정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박정주선생 추념비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1998.4월 건립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본 추념비를 2010년 2월 12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안성섭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성은 박씨요. 충주인이며 명은 정주요 자는 화용이니 진사 홍규의 자로 고종 졸년말 정월 29일에 장수면 필덕리에서 출생하였다. 유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언행이 정중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향리에 모범이 되며 문학에 열중하였다. 당시 국운의 불이로 반만년 이어온 국권이 경술년에 이르러 치욕의 비운에 빠졌었으나 연면한 민족정기는 날로 드높아 기미년 3월에 온 계레가 궐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회천의 대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호응하여 이 고장 장수군에서도 선생의 주도로 동지 10여인과 약속한 산서시일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군중의 만세소리 천지가 경동하자 일경의 총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주모 10여인이 체포되여 각각 옥고를 겪었다. 오직 선생은 주도자로 대구재판심문에서 백주에 도적이 가중에 침입하여 물건을 탈취하여 간다고 외친 것이 무슨 죄냐고 고성질책하여 취조관을 상기시켰다. 수년 옥고를 겪은 후에도 임의로 출입을 억제당하였으나 추호도 굴하지 않는 그 애국애족심은 뒷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저 살아갈 앞길에 등불을 밝혀주셨도다. 광복후 35년이 흐른 기미주년을 맞이하여 필덕리 양노계원 18인이 선생의 장렬한 의거를 추념하고 재천하신 영령의 명복을 삼가 빌며 그지없이 솟구치는 단성을 모와 선생의 출생하신 이 고장에 추념비를 세워 천추에 위적을 전하고저 하는 바이다.
장수군 장수읍 대성리 979-3 필덕마을 앞 박정주선생 추념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