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기념비(산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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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25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운동기념비

3.1운동기념비. 장수군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기미년의 숭고한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산서면을 비롯한 장수군 전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희생당하신 수많은 순국선열과 민중의 숭고한 애국충정과 뜨거운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장수군 관내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던 산서면 동화리 이곳에 1995년 3.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장수군 관내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3.5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3.19.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으며, 첫 거사가 좌절된 장수읍에서도 3월 26일 최영식, 신동관,장재만,양일표,빈양섭 등이 주도하여 산서면 오성리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 만세운동 기간 동안 최영석, 신동관, 장재만, 양일표, 빈영섭 등 수십명이 검거되고 옥고를 겪었다. 이렇게 장수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의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이 되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 대한은 반만년 역사의 문명국이요 또한 세계만방에 예의지국이란 칭송을 얻었다. 시운이 불리하여 홀연히 경술국치를 당하여 이천만동포가 통곡하고 궐기하였으며 세계 각국도 이에 공분하였다. 어두움이 다하면 광명이 오고 영웅이 때를 만드나니 그 국운은 비록 침체되었으나 우리민족의 애국중정이 떳떳한 이치에서 나온다면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고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망국의 부끄러움을 어찌 깊이 근심하겠는가? 아 지난 기미년 3월 1일 하늘을 움직이는 대운동이 전국토에 전개되어 전국의 국민이 일시에 독립만세를 부르니 이 누가 시켜서 그러했겠는가? 모든것이 인심 천심이요 자랑스러운 이치라고 여겨진다. 우리 고장 선열들께서는 여기 발마추어 상기의사들이
향민을 선도하여 도화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대대적으로 시위하셨으니 독립혼을 일깨운 의거로서 어찌 장하지 않으리오.
이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험한 고초를 껵었으나 끝내 굴하지아니하고 모진 고문과 탄압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으니 장렬한 충심이 청사에 기록되어 이제 60여년이 지났다. 지난 임술년에 현지 동지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장한 발자취가 희미해질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서로 발기하고 제회하여 여러 열사의 유풍을 사모하고 장차 비를 세우고 공훈을 기리어 후세에 수범하려하니 진실로 아름다운일이다. 여러분이 글을 청하므로 비록 불민하나 여기 느낀바를 기록하여 명을 한다.
나라에 이름난 고장이 있으니 이름하여 산서라. 훌륭한 선비많고 성하도다.
장수읍으로 가는 길에, GPS상의 주소는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257-1이다.
3.1운동기념비. 장수군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기미년의 숭고한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산서면을 비롯한 장수군 전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희생당하신 수많은 순국선열과 민중의 숭고한 애국충정과 뜨거운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장수군 관내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던 산서면 동화리 이곳에 1995년 3.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장수군 관내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3.5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3.19.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으며, 첫 거사가 좌절된 장수읍에서도 3월 26일 최영식, 신동관,장재만,양일표,빈양섭 등이 주도하여 산서면 오성리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 만세운동 기간 동안 최영석, 신동관, 장재만, 양일표, 빈영섭 등 수십명이 검거되고 옥고를 겪었다. 이렇게 장수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의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이 되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