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실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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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778-7
탐방로그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모신 박춘실 의병장의 전적비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박춘실(朴春實)의병장(1875년∼1914년)은 조선 말기 의병장. 본명은 박동식(朴東植)이고, 일명 박충실(朴忠實)이며, 호는 춘실(春實)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백암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무주, 진안, 장수, 용담등 4개 군 지역에 격문을 돌리고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6년(광무 10) 4월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1908년 까지 무주,장수, 진안‧장수, 용담 등지에서 왜적과 60여 회 교전하여 수백여 명의 적병을 살해하였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전북 문성에서 체포되어 그해 7월 17일에 교수형이 선고되어 전주 감옥에 복역 중 1914년 탈옥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감옥에 이감되어 복역 중 감방의 벽을 파괴하여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순국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덕유산을 거점으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의사들이 계시니 의병대장 문공태서와 박공춘실을 비롯 많은 의병들이시다. 단성문공 태서는 충선공 익절의 24세소이며 문공병현의 장자로 1880년 3월 16일 함양군 서상면 장구동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지,인,용을 두루 갖추었다. 18세에 장수군 계북면 당저로 이사해서 김경여의 딸과 결혼했다.25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박처사로부터 용병술과 총포술을 배우고 을사년에 최익현과 창의를 모의한뒤 덕유산에서 포수 수십인과 창의하니 먼저 50여인을 이끌고 온 박춘실장군과 박수문, 전성보, 신탁광, 이병렬부대를 양악에서 맞아 호남의병단을 결성했다. 총참모장에 문태서, 선봉장에 박춘실, 중군장에 전성보, 후군장에 신탁광, 비서에 박수문으로 정하고 의병 300여인으로 단 편성을 마쳤다. 문공은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농소, 문성, 토옥동, 원통사, 고창,곡구, 천동전투와 장수주둔수비대 이원역습격작전등 연전연승 적을 놀라게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합방이후 왜군의 강세에 몰려 재기를 도모코자 귀향중 1912년 8월 17일 왜군에 체포되어 대구를 거쳐 경성(서울)으로 이감 모진 고문에도 위풍당당했으며 1913년 2월 4일 박춘실과 동지들을 부르면서 지하에서도 조국을 수호하리라는 절규를 끝으로 향년 34세에 장열한 최후를 마치셨다.

밀양박공 춘실은 박공?? 휘언의 16세손이며 박공 상순의 장자로 1875년 10월 13일 진안군 안천면 와정리에서 태어나 장수군 계북면 백암리에서 성장하셨다. 장성하면서 뛰어난 용력과 기백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31세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를 규합 구봉산작전에서 첫승리를 거두고 덕유산으로 이동하여 선봉장으로서 무,진,장,안의, 거창등지에서 종횡무진 유격전을 펼쳐 접전 수백회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특히 적장산전투에서는 적이 호랑이로 부를만큼 용맹을 떨쳤다. 문태서장군이 체포된뒤 총쥐휘장이 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1913년 11월 수천의 왜군과 토옥동에서 접전, 필사적으로 항쟁했건만 장군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감옥을 부수고 동지 백여명을 탈옥시켜 재투쟁케 하는등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가 1914년 6월
2일 향년 40세에 옥중에서 벽에 머리를 찧고 자결하셨다.
또한 무명의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명복을 빈다.
양공께서는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으셨다.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778-7 양악마을 입구에 있는 문태서, 박춘실의병장 전적비

문태서(文泰瑞)의병장은 1880년(고종 17)∼1913년. 조선 말기에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남평이며 경상남도 안의현 서상면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담대했으며 25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을 하였고 26세 되던 해에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하산하였다. 이 해에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헌병대를 습격하고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항쟁하다 1912년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