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승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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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43
탐방로그
2005년 건립된 정인승 기념관을 찾았다. 본래 기념관만 건립되어있었는데 정인승 선생의 이전 묘지 비석 및 석물을 이곳 근처로 이전하였고 추후에 생가도 함께 복원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인승선생의 생가는 팔각정뒤에 보이는 집이지만, 다른 사람이 살고있어서 기념관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한다.
정인승선생의 사당. 건재사
기념관
현재 건재선생의 묘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359에 있다.
하지만 원래는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묘지에 있었다.
묘소앞에 세워졌던 건재 정인승선생 추념비가 묘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할때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되어있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기념관내에도 사람이 없어서 물을수가 없었다.
정인승(鄭寅承, 1897년 ~ 1986년 7월 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국어학자이다. 호는 건재(健齋)이다. 1921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고, 미국행을 희망하였으나 집에서 반대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고 1935년 8월 31일에 그만두었다. 현재 고창고등학교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역사와 민족정신선양비에 그 내용이 잘 나와있다. 이곳 고창고보에서 제자 권승욱선생을 지도하시기도 했다.
1935년 9월 서울로 상경하여 돈암동에 목장을 차리고 양을 기르던 중 최현배를 만나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국어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다가 1942년 10월부터 해방때까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후에는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건재 정인승 선생 어록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세울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 국어운동 50년 조선어학회 시절 중에서
건재 정인승선생 유허비
우리의 얼, 말,글을 일제로 부터 지키고 가꾸기위하여 일생을 불사르신 정인승선생은 1875년 5월 15일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상조공과 송성녀여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니 동래군 휘 란종의 16세손익되시며 동지중추부사 휘 존성의 현손과 중추원의관 휘 기호의 손이되신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11년간 고창고등보통학교교사로 계시는 동안 일제 강압속에서도 국어교육을 고집하시다가 끝내 교단을 물러난뒤에 한글학ㄱ회 "한글"편집및 발행업무를 주관하셨다. 1942년 10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시다가 광복으로 출감하셨다. 1945년 9월부터 우리말큰사전이 나올때까지 편집책임을 맡으셨고 31년에 걸쳐 한글학회 이사로 계시면서 문교부 문법용어제정위원,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스며, 중앙대와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으셨다. 학술원원로회원이신 선생은 전북대학교총장직에서 정년퇴임하신뒤에도 문교부 한글전용심의회전문위원으로 맡으시는등 평생을 우리글 가꾸시는일을 하시다 1986년 7월 7일 향년 90세로 거룩하신 생애를 마치셨다. 건국공로훈장을 비롯 많은 포상과 한글독본외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