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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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산29
탐방로그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산 29 애국지사 전석기 의병장 묘소를 찾았다.
어제 임실과 남원 탐방을 마친 후, 검색과정에서 전석기 의병장의 묘소 위치를 청웅면사무소 사이트에서 발견했다.
더구나 묘소 안내판까지 있었다.
일부 로드뷰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최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묘소 안내판이 있으면, 묘소 위치를 신뢰할 수 있어서, 남원에서 자고 아침 일찍 다시 임실로 달려왔다.
점심시간부터는 고향 문중 회의가 있기 때문에 서둘렀다.
저 왼쪽에 보이는 묘소가 의병장 묘소로 보이는데, 왜 거리가 300m라 되어 있을까?
오른쪽에 보이는 재실로 들어가서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300m 정도 된다. 어제 밤에 확인했었다.
해당 주소의 번지가 꽤 넓은 지역이어서 고민을 했는데, 카메라 줌으로 당겨보니 의병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바로 들어왔다.
재실로 보이는 곳은 영모재라는 재실이었다. 추모재였나? 기억이...
재실 앞에서 전석기 의병장의 묘소 안내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사진에서도 재실 이름 첫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천안김씨 삼재공 휘 후파 16대손 휘 성태 호 효재공 이하 제단비
의병장 휘 석기 호 운수공 배 여사 강화노씨, 배 여사 전주이씨
상섭, 상윤,상영 敬立 2004년 갑신 윤 2월
義兵將 雲水 全錫基 先生 紀蹟碑(의병장 운수 전석기 선생 기적비)
義兵將 雲水 全錫基 先生 紀蹟碑
(의병장 운수 전석기 선생 기적비)
의병장 운수 전석기 선생 기적비 명 병서
제26호 훈장증 고 전석기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 한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국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이로써 선생의 精靈(정령)은 安息(안식)하시고 자손들은 國恩(국은)에 感泣(감읍)하도다. 不啻(불시)라 鄕黨(향당) 남녀노소가 흠모 忭賀(변하)하노이다. 선생은 天姿(천자)가 巍巍(외외)하여 如山岳不動(여산악부동)으로 慷慨(강개) 豁達(활달)하고 毅武孔猛(의무공맹)하여 호학하여 공경 현인하고 유자예유로 개심성의하다 대인무불감화요..후략..
...전략...
융희 2년 무신(1908) 11월 23일 선생 48세로 정성련 휘하 의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제2초 십장(什長)을 임명받아 의병군수품 적기조달하고 전주 金溝泰(김구태) 인임실등지에서 왜노(倭奴)와의 감전(酣戰)에 왜적의 허를 틈타 습격 기 은현출몰이 매우 교모하여 전강(前僵)후 속전공이 혁혁이어늘 융희 3년 기유(1909) 윤 2월 8일 왜노 경찰에 피체되어 형신(刑訊) 혹독하였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재판장을 크게 꾸짖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너희들에게 한일신협약(1907)을 강제로 맺게되어 내정을 간섭 받고 특히 군대를 해산하였으니 무력항쟁을 계속 하려는 것이다". 선생은 교수형 언도를 받아 창의의 정당성으로 대구공소원에 항고하였다. 여기서도 재판장을 강호령(强號令)하여 대한민족 정기를 정정당당하게 외치시니 悲咤怒罵其凜然(비타노매 기 늠연)하였다. 징역형 15년 언도로 옥고 昏倒(혼도)하여 가족들이 들것으로 본가에 모시어 1년여 신음타가 1925년 을축 음12월 28일 새벽 2시 65세를 일기로 순국하시니 오호라 애재 철전지통 한을 회포한채 歸盡也矣(귀진야의)라. 묘는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구례동 후산 29번지 임좌로다.
...후략....
옆에 있는 묘소. 相자 항렬의 후손 묘소로 보인다.
옆에 있는 또 다른 묘소. 역시 후손의 묘소로 보인다.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산 29 애국지사 전석기 의병장 묘소를 찾았다.
의병장 전석기 묘 → 300m. 더구나 묘소 안내판 있었다.
저 왼쪽에 보이는 묘소가 의병장 묘소로 보인다. 오른쪽에 보이는 재실로 들어가서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300m 정도 된다.
해당 주소의 번지가 꽤 넓은 지역이어서 고민을 했는데, 카메라 줌으로 당겨보니 의병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바로 들어왔다.
재실 앞에서 전석기 의병장의 묘소 안내석을 만날 수 있었다.
의병장 전석기의 묘 /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산 29번지
전석기 의병장은 1861년 10월 7일 청웅면 석두리에서 부친 전규택과 모친 옥천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때 선비정신을 훈도받아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48세의 고령에도 전주, 금구, 태인, 임실 등지에서 항일 투쟁 의병대를 지휘하였으며 의용군수품 조달에도 힘썼다. 1909년 왜경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판결받았으나 남의 나라 국권을 침탈하는 왜놈들에 대한 창의의 정당성을 일갈하면서 항고하여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어 형기를 마치고 의병투쟁의 좌절을 한탄하면서 신음하다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재실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길..
묘소단에는 이쁜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