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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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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운암초중등 앞에 조성된 운암 3대운동기념비 중 기미년 3.1운동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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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 三.一 運動 紀念碑(기미 3.1운동 기념비)
己酉年(기유년)에 「合二成一非古非今(합이성일비고비금) 琴調失今古家間翁(금조실금고가간옹)」의 降詩(강시)로 庚戌國恥(경술국치)를 미리 感知(감지)한 孫義庵先生(손의암선생)은 日帝侵略(일제침략)에 대한 警戒(경계)와 아울러 獨立運動準備(독립운동준비)에 事前計劃(사전계획)을 세우며 物心兩面(물심양면)으로 全力(전력)을 다하셨다. 韓半島(한반도)는 地政學的 位置(지정학적위치) 때문에 大陸(대륙)과 海洋勢力(해양세력)의 進出(진출)로 因(인)하여 寧日(영일)이 없는 角逐場(각축장)이 되었었다. 己未獨立運動은 日帝의 굴레서 벗어나 韓中日(한중일) 세나라가 鼎足(정족)의 勢(세)로 東洋(동양)의 安定勢力(안정세력)을 構築(구축)하고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人類幸福(세계평화인류행복)에 必要한 階段(계단)을 만들어 東洋全局(동양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防止(방지)하자는 것이 根本 目的(근본목적)이었다. 孫義庵先生(손의암선생)의 獨立運動準備(독립운동준비)를 미리 感知(감지)한 任實(임실) 崔承雨(최승우) 金榮遠(김영원) 韓永泰(한영태)는 己未 二月 末頃(기미2월 말경)에 全州 老松洞 李君弼 (전주 노송동 이군필) 집에 全羅北道代表(전라북도대표)들과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하기 爲(위)하여 두 차례나 모여서 秘密會談(비밀회담)을 가졌으며, 崔承雨(최승우)는 宣言書(선언서)를 任實(임실), 南原(남원),
淳昌(순창), 鎭安(진안), 長水(장수), 求禮(구례), 谷城(곡성)등지에 보내어 그 地方(지방)에서 獨立萬歲(독립만세)를 부르도록 示唆(시사)하였다. 任實(임실)에서는 三月(삼월) 二日(이일) 子時(자시)에 運庵面 國士奉(운암면 국사봉) 靑雄面 白蓮山(청웅면 백련산) 德峙面 回文山(덕치면 회문산) 三溪面(삼계면) 원통산, 聖壽面 生岩山(성수면 생암산) 新德面 馳馬山(신덕면 치마산)에서 올리는 烽火(봉화)를 信號(신호)로 郡內(군내) 各地(각지)에 宣言書(선언서)를 뿌리고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萬歲(만세)를 부르던 群衆(군중)은 日帝(일제)의 사나운 銃劍(총검)에 依(의)하여 一段 解散(일단 해산)했으나 그 後(후) 6個月(6개월)동안 繼續(계속)하여 郡內各地(군내각지)에서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任實郡內(임실군내)에서 數百名(수백명)이 逮捕(체포)된 중 3명이 獄死(옥사)하였고 百餘名(백여명)이 實刑(실형)을 받았다. 金榮遠(김영원)은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에 의하여 不具(불구)의 몸으로 獄中(옥중)에서 呻吟(신음)하다가 己未(기미) 八月 二十六日(8월 26일)에 獄死(옥사)하였으며 당시 天道敎任實敎區長(천도교임실교구장)인 韓永泰(한영태)는 三月 二日(3월 2일)에 拘束(구속)되여 背後關係(배후관계)를 頑强(완강)하게 否認(부인)하다가 견디다 못하여 3월 9일 子正(자정)에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서 새끼를 꼬아 목매여 自決(자결)하였으며 崔鳳商(최봉상)은 내 나라를 잃고 내 나라를 찾자는 것이 무슨 罪(죄)냐고 倭警(왜경)과 싸우다가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에 못이겨 獄中(옥중)에서 殉國(순국)하고 말았다. 己未(기미) 三.一(삼일) 運動(운동)이 일어난 지 六十(육십)餘年(여년)만에 3.1운동의 偉大(위대)한 殉國(순국)精神(정신)을 되살리면서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爲(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遷推(천추)萬代(만대)의 後孫(후손)들은 愛國愛族(애국애족)의 거룩한 精神(정신)을 이어받아 先進祖國(선진조국)建設(건설)에 邁進(매진)하라
己未(기미) 三一運動(삼일운동)謀議(모의)者(자) 名單(명단)
崔承雨(최승우) 朴準承(박준승) 朴成根(박성근) 姜啓大(강계대) 禹成五(우성오) 朴判德(박판덕) 崔宗洙(최종수) 李康世(이강세) 朴準昌(박준창) 李起東(이기동) 崔良玉(최양옥) 朴永昌(박영창) 朴元燁(박원엽) 許栄(허영) 金漢京(김한경) 朴成言(박성언) 金漢岩(김한암) 金敎升(김교승) 崔宗筫(최종지) 崔宗澤(최종택) 崔汝弼(최여필) 金敎石(김교석) 崔宗煥(최종환) 金敎逸(김교일) 李化永(이화영) 牟洛善(모락선) 崔明國(최명국) 黃喆圭(황철규) 黃俊圭(황준규) 黃承圭(황승규) 朴宗實(박종실) 安敬烈.(안경렬) 尹貴变(윤귀변) 廉析煥(염석환) 金漢翼(김한익) 林在化(임재화) 孔在學(공재학) 朴圭鎭(박규진) 孫太星(손태성) 崔大弼(최대필) 裵碓伊(배대이) 金良洙(김양수) 林喜相(임희상) 朴淳燮(박순섭) 李永道(이영도) 白福南(백복남) 金基先(김기선) 郭元貴(곽원귀) 李明魯(이명노) 朴官洙(박관수) 魯道三(노도삼) 魯道進(노도진)趙英洙(조영수) 崔宗周(최종주) 崔昌植(최창식)
己未(기미) 三一運動(삼일운동)謀議(모의)者(자) 名單(명단)
崔承雨(최승우) 朴準承(박준승) 朴成根(박성근) 姜啓大(강계대) 禹成五(우성오) 朴判德(박판덕) 崔宗洙(최종수) 李康世(이강세) 朴準昌(박준창) 李起東(이기동) 崔良玉(최양옥) 朴永昌(박영창) 朴元燁(박원엽) 許栄(허영) 金漢京(김한경) 朴成言(박성언) 金漢岩(김한암) 金敎升(김교승) 崔宗筫(최종지) 崔宗澤(최종택) 崔汝弼(최여필) 金敎石(김교석) 崔宗煥(최종환) 金敎逸(김교일) 李化永(이화영) 牟洛善(모락선) 崔明國(최명국) 黃喆圭(황철규) 黃俊圭(황준규) 黃承圭(황승규) 朴宗實(박종실) 安敬烈.(안경렬) 尹貴变(윤귀변) 廉析煥(염석환) 金漢翼(김한익) 林在化(임재화) 孔在學(공재학) 朴圭鎭(박규진) 孫太星(손태성) 崔大弼(최대필) 裵碓伊(배대이) 金良洙(김양수) 林喜相(임희상) 朴淳燮(박순섭) 李永道(이영도) 白福南(백복남) 金基先(김기선) 郭元貴(곽원귀) 李明魯(이명노) 朴官洙(박관수) 魯道三(노도삼) 魯道進(노도진)趙英洙(조영수) 崔宗周(최종주) 崔昌植(최창식)
黃善明 (황선면) 池演宗(지연종) 金正文(김정문)康東燁(강동엽) 李德敎(이덕교) 孫正嬅(손정화) 楊錫奉(양석봉) 朴和生(박화생) 金正傕(김정각) 金敎奉(김교봉) (崔洪弼(최홍필) 崔仲弼(최중필) 崔李弼(최이필) 崔武弼(최무필) 嚴玉岩(엄옥암) 金東錫(김동석) 白萬順(백만순) 申夢吉(신몽길) 李憲雨(이헌우) 牟樂善(모낙선) 康京煥(강경환) 金泰順(김태순) 李和永(이화영) 李鍾達(이종달) 朴正源(박정원) 韓俊錫(한준석) 趙友三(조우삼)
甲午東學革命 紀念碑(갑오동학혁명 기념비)
慶州(경주) 龍潭(용담)에서 發祥(발상)한 東學(동학)은 侍天主(시천주)의 價値觀(가치관)을 이 세상에 定立(정립)키 위하여 모진 强壓(강압)과 갖은 迫害(박해)를 받았고 殉道(순도)가 뒤 딸았다. 壬辰年(임진년)에 參禮(삼례)에서 蹶起(궐기)한 伸冤運動(신원운동)은 東學運動(동학운동)의 嚆矢(효시)인 同時(동시)에 世界史的(세계사적)으로 非暴力示威(비폭력시위)의 萌芽(맹아)이었다. 大神師(대신사)가 天命(천명)으로 無極大道(무극대도)를 받아 死地(사지)에 빠져 있는 人類(인류)를 救濟(구제) 하려다가 左道亂政(좌도난정)의 罪目(죄목)으로 斬刑(참형)을 당하신 것이 抑鬱(억울)함을 펴자는 것이 伸冤運動(신원운동)의 表面的(표면적)인 理由(이유)이고 先天(선천)의 그릇된 價値觀(가치관)에 基因(기인)하여 人間精神(인간정신) 深層(심층)에 깔려 있는 怨恨(원한)을 풀어서 侍天主(시천주)의 價値觀(가치관)으로 바꾸자는 것이 그 裏面的(이면적)인 理由(이유)이었다. 그러한데 대신사의 伸冤運動(신원운동)은 아직 이룩하지 못하고 世界의 存亡(존망)까지 몰고 온 兩極思想(양극사상)의 絶壁(절벽)에 부딛치고 있다. 그러므로 甲午東學革命運動(갑오동학혁명운동)은 壬辰年(임진년) 參禮(삼례)에서 처음 일어난 伸冤運動(신원운동)의 擴散(확산)이며 延長(연장)이었다. 民族的(민족적) 矛盾(모순) 斥洋斥倭(척양척왜)와 階級的(계급적) 矛盾(모순) 除暴救民(제폭구민)을 함께 克服(극복)키 위하여 後天開闢(후천개벽)의 革命情神(혁명정신)으로 武裝(무장)하고 接主(접주) 全琫準(전봉준)이 湖南(호남)의
萬石洑(만석보) 기슭에서 數千(수천)의 東學軍(동학군)을 編成(편성)하여 첫 烽大(봉기)를 든 것은 甲午正月(갑오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大擧(대거)하여 白山을 占據(점거)하고 全州城(전주성)까지 陷落(함락)하여 政府側(정부측)과 和解(화해)하기에 이르렀다. 甲午 3월 25일에 起包(기포)한 北接大接主(북접대도주) 崔贊國都接主(최찬국도접주) 崔承雨接主(최승우접주) 金신종 李炳春(이병춘)은 任實(임실)에 執綱所(집강소)를 두고 12개조의 民政改革案(민정개혁안)으로 民弊(민폐)를 一掃(일소)하고 그 餘力(여력)을 오로지 地方組織(지방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不拘(불구)하고 軍國主義(군국주의) 日帝(일제)의 野慾(야욕)은 突然(돌연) 남의 나라 主權(주권)을 侵害(침해)하면서 競爭(경쟁) 相對(상대)의 淸國軍(청국군)을 敗走(패주)시키고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을 獨占(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영 國家(국가)의 命脈(명맥)이 風前燈火(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執綱所(집강소)를 設置(설치)하고 弊政改革(폐정개혁)과 地方(지방) 組織(조직)에 沒頭(몰두)했던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도 다시 起包(기포)하여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와 柳泰洪(유태홍)과 같이 南原(남원)에서 泰仁(태인) 金開南軍(김개남군)과 合流(합류)하고 甲午(갑오) 八月(8월)에는 東徒大將(동도대장) 全琫準(전봉준)과 全州(전주)에서 合勢(합세)하여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은 參禮(삼례) 論山(논산)을 거쳐 公州城(공주성)을 攻略(공략)하게 되었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의 增援部隊(증원부대)가 近代(근대)의 무서운 殺人武器(살인무기) 機關銃(기관총)으로 連續猛射擊(연속맹사격)을 퍼붓게 되니 惡戰苦鬪(악전고투) 三日(삼일)만에 任實東學軍(임실동학군)도 莫大(막대)한 犧牲者(희생자)를 내면서 戰友(전우)들의 屍山血河(시산혈하)를 넘고 넘어서 論山(논산) 方面(방면)으로 後退(후퇴)하였다. 甲午八月(갑오8월) 南原山東面(남원산동면) 後谷(후곡) 女院峙(여원치)에서 數千名(수천명)의 東學軍(동학군)이 戰死(전사)하였고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는 甲午(갑오) 十二月 二十七日(12월 27일) 李應白(이응백)에게 逮捕(체포)되어 乙未(을미) 二月 十三日 (2월 13일) 斬首刑(참수형)을 당하고 崔承雨(최승우) 崔由河(최유하) 金學遠(김영원) 金榮遠(김영원) 韓永泰(한영태) 崔東弼(최동필)은 淳昌回文山(순창회문산)까지 敗走(패주)하여 이곳에서 蟄居生活(칩거생활) 6년 만에 겨우 生命(생명)을 維持(유지)하였다. 그러나 任實(임실)에서 東學軍(동학군)이 起包(기포)한지 九十年 (90년) 만에 새삼 東學革命(동학혁명)의 殉國精神(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爲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千秋萬代(천추만대)의 後孫(후손)들은 이 偉大(위대)한 革命精神(혁명정신)을 이어 받아 힘차게 宣揚(선양)하라.
甲午東學革命 接主 接司名單 (갑오동학혁명 접주 접사 명단)
北接大接主崔贊國(북접대접주최찬국).
道接主崔承雨(도접주최승우).
接主金榮遠(접주김영원). 金學遠(김학원). 韓永泰(한영태). 崔由河(최유하). 崔東弼(최동필). 許善種(허선종) 趙錫烋(조석효) 李炳春(이병춘) 朴京武(박경무). 林德弼(임덕필). 黃熙榮(황희영).李鍾勤(이종근) 林再洙(임재수). 梁경보. 嚴종성. 文吉鉉(문길현). 李萬化(이만화). 李용거. 李병용. 鄭士會(정사회). 韓君正.(한군정) 崔鳳頊(최봉욱) 崔鳳九(최봉구). 朴廷喚(박정환). 朴成根(박성근). 金茂龍(김무용). 朴準承(박준승). 楊化三(양화삼). 崔鳳商(최봉상).
接司(접사) 金敎弼(김교필). 李鍾鉉(이종현). 李龍洙(이용수).朴萬澤(박만택). 宋光浩(송광호). 金景煥(김경환). 申鶴來(신학래). 崔賢弼(최현필). 崔學弼(최학필). 崔權瑞(최권서). 萬成五(우성오). 崔宗箕(최종기). 李治悅(이치열). 全勇琦(전용기). 李龍必(이용필). 李昌化(이창화). 李白雨(이백우). 李鍾仁(이종인). 崔太瑞(최태서). 李化先(이화선). 鄭相容(정상용). 白弼煥(백필환). 李光儀 (이광의). 姜喜鎭(강희진). 鄭相悅(정상열). 金判奉(김판봉). 李鍾文(이종문)
接主(접주) 崔鎭學(최진학)
비문 출처 : 천도교 전주교구 카페
北接大接主崔贊國(북접대접주최찬국).
道接主崔承雨(도접주최승우).
接主金榮遠(접주김영원). 金學遠(김학원). 韓永泰(한영태). 崔由河(최유하). 崔東弼(최동필). 許善種(허선종) 趙錫烋(조석효) 李炳春(이병춘) 朴京武(박경무). 林德弼(임덕필). 黃熙榮(황희영).李鍾勤(이종근) 林再洙(임재수). 梁경보. 嚴종성. 文吉鉉(문길현). 李萬化(이만화). 李용거. 李병용. 鄭士會(정사회). 韓君正.(한군정) 崔鳳頊(최봉욱) 崔鳳九(최봉구). 朴廷喚(박정환). 朴成根(박성근). 金茂龍(김무용). 朴準承(박준승). 楊化三(양화삼). 崔鳳商(최봉상).
接司(접사) 金敎弼(김교필). 李鍾鉉(이종현). 李龍洙(이용수).朴萬澤(박만택). 宋光浩(송광호). 金景煥(김경환). 申鶴來(신학래). 崔賢弼(최현필). 崔學弼(최학필). 崔權瑞(최권서). 萬成五(우성오). 崔宗箕(최종기). 李治悅(이치열). 全勇琦(전용기). 李龍必(이용필). 李昌化(이창화). 李白雨(이백우). 李鍾仁(이종인). 崔太瑞(최태서). 李化先(이화선). 鄭相容(정상용). 白弼煥(백필환). 李光儀 (이광의). 姜喜鎭(강희진). 鄭相悅(정상열). 金判奉(김판봉). 李鍾文(이종문)
接主(접주) 崔鎭學(최진학)
비문 출처 : 천도교 전주교구 카페
戊寅滅倭運動紀念碑 (무인멸왜운동기념비)
前世(전세)壬辰(임진) 몇해런고 二百四十(240)아닐런가 개 같은 倭賊(왜적)놈을 한울님께 造化(조화)받아 一夜(일야)間(간)에 滅(멸)하고서 大報壇(대보단)에 맹서하고 汗(한)의 원수 갚아보세 이 말씀은 天道敎(천도교) 一世敎祖(일세교조)이신 수운 대신사가 民族(민족)의 將來(장래)를 豫示(예시)하고 걱정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天道敎人(천도교인)들은 一世紀(일세기)동안 끊임없이 抗日運動(항일운동)을 持續(지속)해 왔었다. 포덕 七七年(77년)(1936) 8월 14일에 一枝梅(일지매)처럼 표일한 절개로 貞節(정절)을 지켜온 4世(4세) 大道主(대도주)春菴(춘암)上師(상사)께서 過去(과거)에는 스승님들께서 傳統的(전통적)으로 安心(안심)歌(가)中(중)滅(멸)倭(왜)心告(심고)를 實行(실행)해왔지마는 이제는 時期(시기)가 成熟(성숙)했음으로 一般(일반)頭目(두목)들과 敎人(교인)들에게 「無窮(무궁)한 내 造化(조화)로 개 같은 倭賊(왜적)놈을 一夜(일야)間(간)에 滅(멸)하고서 前(전)地(지)無窮(무궁)하여 놓고 大報壇(대보단)에 맹서하고 汗(한)의 怨讐(원수)
까지 갚겠습니다.」 라고 朝夕(조석)食告(식고)때에 至誠(지성)껏 祈禱(기도)하라고 密令(밀령)을 내리셨다. 이렇게 멸왜기도와 우리나라 主權(주권)回復(회복)運動(운동)이 極秘裏(극비리)에 進行(진행)되던 途中(도중) 布德(포덕)79년 (1938) 2월 17일 이 事實(사실)이 信川(신천)警察署(경찰서)에 摘發(적발)되어 外部(외부)로 露出(노출)擴大(확대)되었다. 그리하여 黃海道(황해도) 淵源(연원)代表(대표) 洪順義(홍순의)를 筆頭(필두)로 최준모와 中央(중앙) 幹部(간부) 여러분이 被檢(피검)되었고 春菴上師(춘암상사)께서는 老患(노환)으로 病床(병상)訊問(신문)에 그쳤으나 이로 인하여 全國(전국)各地(각지)에서 數百(수백)名(명)의 敎役者(교역자)들이 投獄(투옥)되었었다. 임실에서도 崔鍾箕(최종기) 金漢京(김한경) 金敎升(김교승) 崔宗澤(최종택) 朴成言(박성언)등이 滅(멸)倭(왜) 기도사건으로 被檢(피검)되어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을 받았었다. 그러한 고문여독으로 출감 후 즉시 환원한 분이 김재규(장흥) 손필규(논산) 이강우(해남) 金(김)鼎(정)三(삼) 네 분이었다. 전세임진 왔다가서 순싼일 못했다고 쇠술로 밥을 먹지 않고 젓가락으로 먹으면서 朝鮮(조선)侵略(침략) 하기 위하여 삼백여년동안 畫(화)策(책) 해온 日本(일본)이 3년동안이나 전교회적으로 멸외기도를 실행한 천도교인들을 無罪(무죄)로 釋放(석방)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物理的(물리적) 降服(항복)이 아닌 精神(정신)적 降服(항복)이었다 그러므로 무인멸왜기도는 갑오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정신적 脈絡(맥락)을 이어받았다. 南北(남북)分斷(분단)의 祖國(조국)이 아직도 統一(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오늘 멸왜 기도의 精神的(정신적) 意義(의의)를 되새기고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이 碑(비)를 세워 先烈(선열)들의 거룩한 殉道(순도)殉國(순국)精神(정신)을 千秋(천추)萬代(만대)에 傳(전)한다.
戊寅滅倭運動謨議加擔者名單(무인멸외운동 가담자 명단) 無順(무순)
崔宗箕(최종기) 金漢京(김한경) 崔宗澤(최종택) 金敎升(김교승) 朴成言(박성언) 李洪國(이홍국) 宋化仲(송화중) 李富淵(이부연) 金正三(김정삼) 李成男(이성남) 李成祚(이성조) 李洪燮(이홍섭) 李銀潭(이은담) 李元潭 (이원담) 朴俊表(박준표) 李晩得(이만득) 池相文(지상문) 李鍾貴(이종귀) 黃鎬仲(황호중) 李福永(이복영) 李道根(이도근) 李起喆(이기철) 林八葉(임팔엽) 朴永俊(박영준) 黃鎬益(황호익) 林鍾基(임종기) 李鎭實(이진실) 崔福祿(최복록)
戊寅滅倭運動謨議加擔者名單(무인멸외운동 가담자 명단) 無順(무순)
崔宗箕(최종기) 金漢京(김한경) 崔宗澤(최종택) 金敎升(김교승) 朴成言(박성언) 李洪國(이홍국) 宋化仲(송화중) 李富淵(이부연) 金正三(김정삼) 李成男(이성남) 李成祚(이성조) 李洪燮(이홍섭) 李銀潭(이은담) 李元潭 (이원담) 朴俊表(박준표) 李晩得(이만득) 池相文(지상문) 李鍾貴(이종귀) 黃鎬仲(황호중) 李福永(이복영) 李道根(이도근) 李起喆(이기철) 林八葉(임팔엽) 朴永俊(박영준) 黃鎬益(황호익) 林鍾基(임종기) 李鎭實(이진실) 崔福祿(최복록)
安鎭龍(안진용) 朴龍雲(박용운) 孫福萬(손복만) 李起煥(이기환) 崔東安(최동안) 崔東鎭(최동진) 金正甲(김정갑) 金正洙(김정수) 嚴昌吉(엄창길) 申貴童(신귀동) 郭東蓮(곽동련) 李禹相(이우상) 李判山(이판산) 金南釗(김남쇠) 金正烈(김정렬) 廉東文(염동문) 廉景洙(염경수) 林太圭(임태규) 申玉振(신옥진) 朴基永 (박기영)朴京官(박경관) 李鍾貴(이종귀) 朴官道(박관도) 朴貴奉(박귀봉) 金炯錫(김형석) 金貴奉(김귀봉) 金炯文(김형문) 魯龍燮(노용섭) 魯仁燮(노인섭) 金基先(김기선) 崔昌順(최창순) 禹奉敏(우봉민) 金聖表(김성표) 金正大(김정대) 崔東琓(최동완) 崔相武(최상무)
비문 출처 : 천도교 전주교구 카페
비문 출처 : 천도교 전주교구 카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운암초중등앞 운암 3대운동기념비(기미 3.1운동, 갑오 동학혁명, 무인 멸왜운동)
갑오동학혁명은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을 기치로 갑오년(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무인멸왜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기도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갑오동학혁명은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을 기치로 갑오년(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무인멸왜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기도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운암 3대 운동기념비
이 기념비는 동학농민운동과 3.1독립운동, 무민 멸왜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도교 후손들의 대표인 최동안 김정갑 선생의 주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3년 6월 17일 후손들의 부담과 각계의 후원금에 힘입어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동학농민운동과 3.1독립운동, 무민 멸왜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도교 후손들의 대표인 최동안 김정갑 선생의 주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3년 6월 17일 후손들의 부담과 각계의 후원금에 힘입어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