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315
- 탐방로그
- 이기송 선생의 집터는 밭으로 변해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오수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여 7년의 옥고를 치른 이기송 선생이 살던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315"를 찾아가고 있다.
이기송(李起松, 1888~1939)은 임실지역 유지로서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중히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 이기송은 오병용, 이만의 등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하여 호소하고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순사가 출동하여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가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기송(李起松, 1888~1939)은 임실지역 유지로서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중히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 이기송은 오병용, 이만의 등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하여 호소하고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순사가 출동하여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가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 날 저녁 남원 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대열과 대치하다가 무자비한 발포로 일단 해산되었으나,
시위군중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단행된 검속에 의하여 붙잡힌 이기송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기송 선생의 집터는 밭으로 변해있었다.
시위군중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단행된 검속에 의하여 붙잡힌 이기송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기송 선생의 집터는 밭으로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