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130-1
- 탐방로그
-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130-1에 위치한 이원영 충효정려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암 전주이공 원영지충효비문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충효를 강상의 으뜸으로 삼아 누구나 이를 실행하려하였으나 그것이 어려웠다. 그러기에 조정에서는 이를 찾아 ?양하고 정려를 세우게 명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본받게하고 또한 이것을 교화하였다. 그런데 근대에는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여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호남의 임실에 이를 실천한 사람이 있으니 곧 청암 전주이공 휘 원영 그분이다. 청암공은 개국공신 완산부원군 휘 백유와 연산조의 무오명현 정간공 한재 휘 목의 후이며, 한말의 의병장 정재 휘 석용의 아들로 1899년 광무 13년 기해 5월 14일에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충효를 강상의 으뜸으로 삼아 누구나 이를 실행하려하였으나 그것이 어려웠다. 그러기에 조정에서는 이를 찾아 ?양하고 정려를 세우게 명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본받게하고 또한 이것을 교화하였다. 그런데 근대에는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여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호남의 임실에 이를 실천한 사람이 있으니 곧 청암 전주이공 휘 원영 그분이다. 청암공은 개국공신 완산부원군 휘 백유와 연산조의 무오명현 정간공 한재 휘 목의 후이며, 한말의 의병장 정재 휘 석용의 아들로 1899년 광무 13년 기해 5월 14일에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
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충효의 길을 실천에 옮기려 애썼다. 정재공이 을사혁약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것을 분하게 여겨 ???의거하여 토왜타가 중과부적으로 패하니 선공은 일시 몸을 숨겼다. 이때에 왜군은 그의 가옥을 소각하고 ??려하니 선공은 가솔과 몇 막하를 거느리고 지리산 달궁으로 들어가 남원의 의병장 진사 고광수군과 합세하여 ???을 벌릴것을 협의하였다. 이때에 공도 선공을 모시고 들어갔는데 선공은 고진사와 결혼을 합의하여 그 산중 ??진사의 영애와 혼례를 거행하였으니 이 또한 의군만이 격은 겪은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얼막뒤인 1914년 ???공은 왜군에게 잡히어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에 공은 법정으로 뛰어들어가 ???왜정의 포악무도함을 꾸짖으니 저들은 법정소란죄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후 풀려나와 공은 바로 선공의 장례를 치르고는 3년을 한결같이 ?묘를 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백립을 쓰고 망국의 한과 실부의 통한을 종신토록 잊지아니하였다. 또 왜의 치하에서는 왜의 호적에 등재되는것을 거부하고 삭발에도 불응하매 왜경은 수차나 투옥시켰지만 끝까지 굴하지않고 한국인의 이개를 떨쳤다. 또한 선공의 유허비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격었다. 우리조국의 광복도 이러한 설열들의 살신성인의 유택으로 얻어진거시 아닌가. 공은 광복후에도 선공의 공을 정부에 올려 건국공로훈장을 박았으며 임실 성수에 소충사를 세워 선공을 제향하였으니 공이 평생에 품었던 한을 일부나마 풀었다. 공이 1983년 계해 11월 25일에 졸하니 향년 85였다. 공이 졸한 뒤인 1990년에 공도 또한 건국공로훈장 액구장을 받았다. 이와같은 충효?전의 ?행에 대하여 성균관장을 비롯하여 각처 향교에서 포양의 글이 답지하니 공의 영윤 명근씨는
그 ?행을 비에 새기고자 글을 청하여 천식불문하나 사양치 못하고 외감히 그 개략을 위와 같이 적는다.
이원영 충효정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