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4
- 탐방로그
-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이석용 의병장 생가 뒤편에 의병장의 유허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가고 있다. 이 유허비는 의병장께서 순국 후에 건립되었지만, 일본 헌병에 의해 파손되었고, 해방 후 이석용 의병장 아드님이신 이원영에 의해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또 파손된 유허비는 소충사 기념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이석용 선생의 유허비와 생가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재 이선생유허비'에 대해 임실군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674번지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규격은 높이 102㎝, 폭 35㎝, 두께 13㎝이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글씨는 최성식이 썼다.
비석은 아들인 이원영을 비롯하여 뜻을 같이한 유지들이 세웠는데 비석 전면은 정재이선생유허비 (靜齋李先生遺墟碑)라고 되어있으며, 비문을 지어 1938년 11월 29일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세운 유허비는 일본강점기인 1941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비석의 음기에 기록된 사람들 일부가 체포되고 일부는 수배되었는데 이에 가담한 사람들 중 아들 이원영을 비롯하여 6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분묘제사초상등 취체령 위반’으로 투옥되어, 이원영은 징역 10월, 박원충, 심한경, 이존칠, 이현승, 이맹호, 최병섭이 각각 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잡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도피하여 화를 면했다.
그때 세워진 유허비는 일본인들이 파손하여 없앴으나, 해방 후 찾아보니 윗부분은 없고 아래 부분만 발견되어 현재 소충사 기념관에 보관하고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 중에 있다.
현재의 유허비는 해방 후 아들인 이원영이 다시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674번지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규격은 높이 102㎝, 폭 35㎝, 두께 13㎝이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글씨는 최성식이 썼다.
비석은 아들인 이원영을 비롯하여 뜻을 같이한 유지들이 세웠는데 비석 전면은 정재이선생유허비 (靜齋李先生遺墟碑)라고 되어있으며, 비문을 지어 1938년 11월 29일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세운 유허비는 일본강점기인 1941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비석의 음기에 기록된 사람들 일부가 체포되고 일부는 수배되었는데 이에 가담한 사람들 중 아들 이원영을 비롯하여 6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분묘제사초상등 취체령 위반’으로 투옥되어, 이원영은 징역 10월, 박원충, 심한경, 이존칠, 이현승, 이맹호, 최병섭이 각각 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잡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도피하여 화를 면했다.
그때 세워진 유허비는 일본인들이 파손하여 없앴으나, 해방 후 찾아보니 윗부분은 없고 아래 부분만 발견되어 현재 소충사 기념관에 보관하고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 중에 있다.
현재의 유허비는 해방 후 아들인 이원영이 다시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이석용 의병장 생가 뒤편에 의병장의 유허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가고 있다.
이 유허비는 의병장께서 순국 후에 건립되었지만, 일본 헌병에 의해 파손되었고,
해방 후 이석용 의병장 아드님이신 이원영에 의해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또 파손된 유허비는 소충사 기념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이 유허비는 의병장께서 순국 후에 건립되었지만, 일본 헌병에 의해 파손되었고,
해방 후 이석용 의병장 아드님이신 이원영에 의해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또 파손된 유허비는 소충사 기념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이석용 생가(李錫庸 生家)
이석용 생가(李錫庸 生家) / 전라북도 기념물 제 91호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이 집은 이석용이 태어나서 1903년까지 살던 곳으로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석용은 대한제국 융희1년(1907)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기삼연(奇參衍) 등 호남의 유림들과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석용은 의병장 김동신(金東臣)과도 합세하여 진안, 장수 등지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석용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4년 4월 서른여섯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 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석용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이 집은 이석용이 태어나서 1903년까지 살던 곳으로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석용은 대한제국 융희1년(1907)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기삼연(奇參衍) 등 호남의 유림들과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석용은 의병장 김동신(金東臣)과도 합세하여 진안, 장수 등지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석용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4년 4월 서른여섯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이 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석용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大韓義士李錫庸(대한의사 이석용)
단기 4211년 무인 11월 29일생
단기 4211년 무인 11월 29일생
静齋 李先生 遺墟碑(정재 이선생 유허비)
静齋 李先生 遺墟碑(정재 이선생 유허비)
静齋 李先生 遺墟碑(정재 이선생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