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6
- 탐방로그
-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6(봉강길 121) 계월마을 비비정 애국지사 화봉 최창렬 유허비를 찾아왔다. 인터넷에는 성수면 봉강리 121로 되어있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오래 걸렸다. 飛飛亭(비비정)은 옥녀봉(玉女峰)아래 계월리 동네 안에 있는 누정이다. 간재 전우(田愚)의 비비정 이 건기에 의하면 원래 선조6년(1573)에 창주 僉使 전주인 최영길이 삼례 비비정에 세원던 것을 10세손 창렬이 계월촌으로 옮겨지었다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 3월에 재건되었다. 비비정 바로 뒷편에 있는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9(봉강길 123-1) 복숭아밭으로 변해버린 애국지사 화봉 최창렬 선생 생가터를 찾아보았지만 예전에 있었던 본가가 멸실되고 아무것도 없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화봉 최공 창렬 유허비
선열님의 휘는 창열 자는 회경 호는 화봉이며 전주최씨 시조 문성공 22세손으로 중랑장공파 연촌자손이며 임실군 성수면 봉강길 123번지에서 부 우택 모 이 향자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1877년 7월 5일 출생하셔서 전주이씨 창자와 혼인하여 슬하에 3형제를 두시고 1940년 7월 4일 향년 64세로 타계하셨으며 묘소는 보면 대판리 뒷산에 있다가 2016년 6월 8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5단지 117호 안장되셨다. 선열님은 최익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시다가 면암이 절명하자 후에 간재 전우선생 문하에서 성리학(성리, 의리, 이기. 우주의 원리등을 연구하는)을 공부하셨으며 전주 임실 남원 남원 장수 진안지역을 대표하는 한학자로서 본가와 서당에서 강학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선열님을 따르는 문하생들이 많았다. 완주 삼례 비비마을에 있던 비비정이 일제의 만행으로 소실되었는데 우암 선생의 친필로 내린 현판만을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건졌다는 주민에게서 인수받아 스승인 간재선생으로 부터 이건기를 받아 이곳에 중건하셨다. 최익현선생의 항일운동과 이석용장군의 호남 임자 동맹밀단 임실지역 총책임자로 많은 의병과 군자금을 모아 호남의병장에게 전달하는 독립운동을 펼치셨다. 후손들의 무지로 선열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늦게나마 선생의 이러한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국가로 부터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으셨다. 선열의 생가터에 선열의 공적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워 보국안민의 뜻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본가마저 훼손되어 공허하게 되어 선열님께서 중건하셔 애환이 서린 이곳 비비정 뜰어 후손들이 선열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우국충정과 숭조 정신을 높이 받들고 친족간의 화합을 다짐하고자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2017년 5월 6일 후손 일동 찬
2017년 5월 6일 후손 일동 찬
세속을 경계하며 장부가 죽을지언정 어찌 왜놈과 양놈에 물들겠는가?
너 또한 동방의 좋은 이름 지었네.
촘촘히 꿰만 옷, 몸가리기 어렵고
성긴 짧은 머리, 형체 잊기 쉬워라.
임금도 없고 애비도 없는 이 애처러운 물건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어디에서 태어난 것일까?
만약 조상의 영혼이 계신다면
천추에 통곡하는 울음소리 끊이지 않으리.
화봉유고에서
너 또한 동방의 좋은 이름 지었네.
촘촘히 꿰만 옷, 몸가리기 어렵고
성긴 짧은 머리, 형체 잊기 쉬워라.
임금도 없고 애비도 없는 이 애처러운 물건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어디에서 태어난 것일까?
만약 조상의 영혼이 계신다면
천추에 통곡하는 울음소리 끊이지 않으리.
화봉유고에서
비비정 바로 뒷편에 있는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9(봉강길 123-1) 복숭아밭으로 변해버린 애국지사 화봉 최창렬 선생 생가터를 찾아보았지만 예전에 있었던 본가가 멸실되고 아무것도 없었다.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6(봉강길 121) 계월마을 비비정 애국지사 화봉 최창렬 유허비를 찾아왔다.
인터넷에는 성수면 봉강리 121로 되어있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오래 걸렸다.
인터넷에는 성수면 봉강리 121로 되어있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오래 걸렸다.
飛飛亭(비비정)
애국지사 화봉 최공 창렬 유허비